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
이어서 나오는 ‘지혜 있는’과 ‘어리석은’이라는 형용사는 ‘헬라인’과 ‘야만인’의 의미를 설명해준다.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네덜란드 태생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인문주의자. 신약성경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새롭게 다시 번역함)는 이 형용사들을 ‘학식 있는’과 ‘무식한’으로 아주 훌륭하게 번역했지만, 나는 바울이 사용한 단어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로마인들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사려 깊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해도, 바울은 자기가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 확신이 교만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그는 자신의 직분에 근거해서 논증을 펼친다.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지혜 있는 자들에 대해서도 빚진 자가 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복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혜 있는 자들에게 약속되고 제시된다. 이는 주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그분께 복종시키셔서, 모든 재주와 각종 학문과 온갖 예술의 극치가 그분의 가르침이라는 단순함에 자리를 내어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지혜 있는 자들은 무지한 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 마음이 아주 부드럽고 수용적으로 되어서,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선생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함께 배우는 동료 제자들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다. 예전 같으면 자기를 낮춰서 그들을 같은 문하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학식이 없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며 근거 없는 두려움 때문에 거기서 도망가서도 안 된다. 바울이 그들에게 빚진 자였다면, 그리고 훌륭한 믿음을 빚진 자로 여겨지기를 원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기가 빚진 것을 갚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지한 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모든 교사들이 따라야 할 하나의 규칙이 있다. 즉, 부드럽고 자상한 방법으로 무지하고 학식이 없는 사람들의 수준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사들은 많은 어리석은 행동들과 질색할 만한 끊임없는 일들을 더 차분한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때문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교사들의 책임이 그들의 우매함을 지나치게 받아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