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롬1:9
그는 로마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그 결과를 들어 입증한다. 그들에 대한 사랑이 크지 않았다면, 그는 그토록 열심을 내서 그들을 주님께 올려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직접 수고함으로써 그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려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과 열망은 그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명백하게 증거해준다. 관심과 열망은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서 로마인들의 확실한 신뢰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신의 신실함을 확신시키기 위해 맹세의 말을 덧붙인다.
맹세는, 어떤 주장이 확실하지 않을 때마다 그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다. 맹세가 그저 하나님께 우리의 말에 대해 확증해주시기를 호소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맹세한 것에 대해서 그 지혜를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는 맹세를 했지만 맹세를 금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위반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재세례파(Anabaptists,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급진적 개혁을 따른 개신교 종파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음) 사람들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맹세를 완전히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준행을 회복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율법은 맹세를 허용하되, 거짓 증거와 불필요한 서약만은 정죄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맹세를 바르게 사용하고자 한다면, 사도들이 보여준 진지하고도 존중하는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맹세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워 그분께 호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거짓 서약을 할 경우 우리를 벌주실 분으로 그분을 소환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다른 본문에서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고후 1:23)라고 진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무례한 자들이 무모하고도 뻔뻔스럽게 그분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언급한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거짓 맹세 하는 것을 망설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의 모양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신의 심령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체하고 겉으로 볼 때는 정말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가 고대의 종교 의식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 의식들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자기가 이런 의식들을 몸에 익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그가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진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신실한 사랑의 마음으로 섬겼다는 것을 자랑한다. 이것이야말로 참 신앙이며 올바른 예배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울에게는 사람들이 자기의 맹세를 더욱 기꺼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헌신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했다.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거짓 맹세가 웃음거리지만, 신앙심이 깊은 자들에게 그것은 천 번의 죽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곳에는 그분의 이름에 대한 참된 존경 또한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맹세를 할 때 요구되는 신성함과 정직함을 잘 알고 있으며, 무례한 자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것처럼 경박하게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의 실례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맹세를 할 때는 언제나 경건의 증거를 보임으로써 우리의 선언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에 합당한 신성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겉으로만 예배한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자신의 사역에서 찾아 제시한다.
그가 자신을 부인했다는 점,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치욕과 가난과 죽음과 증오라는 모든 역경을 마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드린 사람이라는 완벽한 증거였다.
어떤 해석자들은 이 어구에 대해, 바울이 자기가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한 예배가 우리에게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복음의 명령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 예배를 찬양하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앞의 해석이 훨씬 더 적절하다.
한편,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려 하기보다는 다른 동기를 가졌던 위선자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망이나 그와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서, 자기들의 사역을 전혀 신실하고 충실하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은, 바울이 가르치는 자신의 직분에 성실하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헌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 적절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유용한 교훈을 추론하게 된다. 즉, 복음의 사역자들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귀한 섬김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아주 큰 힘을 얻는다.
자기들의 수고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될 뿐 아니라 가장 고귀한 예배 행위로 여겨질 만큼 그분이 인정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과연 그들로 하여금 그 최고의 섬김을 그만두게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아가서 바울은 복음을 ‘그분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알려지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 아버지 하나님 또한 영화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버지께 지명을 받으셨다.
바울은 자기가 그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계속해서 표현한다. 주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들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대한 대단한 증거이다.
이 어구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나는 ‘판토테’(pantote, 항상)라는 단어를 ‘내 모든 기도에서’ 혹은 ‘내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종류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헌신해서 드리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인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런저런 절규의 기도를 자주 드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작정하고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을 때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도 떠올렸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기도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의도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주님 자신도 기도하기 위해서 물러가 쉴 곳을 찾으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에 전념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기도 습관의 빈도(頻度)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지속성을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