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유대인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으로 10장을 시작하면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한 근거 없는 신뢰가 유대인들이 파멸하게 된 원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핑계 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도 우리를 믿음에서 난 의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덧붙여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에게 차별 없이 이 의義가 주어졌으나 그분이 특별한 은혜로 빛을 비추어준 사람들만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또한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이방인들이 이 축복을 받게 되었으나 이것 역시 모세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음을 밝힌다. 모세는 이방인들이 부름 받는 것에 대해서,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에 대해서 예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질문에 대해 답하려 할 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택하심의 문제는 자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는 오해였다. 칠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을 싫어하는 불신자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고 이른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의 언약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된 자들에게 동일하게 남아 있지만 그분의 자유로운 택하심에 의해서 예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그러하다고 단언한다. 그런 다음 이방인들을 향하여 그들의 양자 됨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을 냉대冷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받아주셨다는 사실 외에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다. 사실 이것은 그들이 더 겸손해야 할 이유가 된다.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의 씨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믿음을 시기하게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그분 자신께로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세 장은 권고의 글이지만 그 내용은 각기 다르다. 12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들을 담고 있다. 13장의 대부분은 위정자爲政者의 권위에 대해서 다룬다. 아마도 국가 권력을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런 자유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던 모양이다. 교회에 사랑의 의무 외에 다른 어떤 의무를 부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바울은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것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지금까지 언급한 적이 없는 우리 삶에 대한 지침들을 덧붙인다.
14장에서 그는 그 당시 특별히 필요했던 권면의 말을 한다. 당시에 미신적 관습을 고집하는 마음이 강해서 모세의 의식儀式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 의식들을 지키지 않는 것이 가장 무거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이러한 의식들이 폐기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서 미신적 관습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양쪽 다 그 정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전자는 상대편이 하나님의 율법을 업신여긴다고 경멸한 반면, 후자는 상대편이 너무 단순하다고 분별없이 비웃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양쪽 모두 신중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전자에게는 업신여김과 모욕을 삼가라 하고, 후자에게는 지나친 불쾌함을 드러내지 말라 명한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사랑과 덕을 세우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어떤 것이든 행해서는 안 된다고 명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절한 관심과 존중을 표한다.
15장은 바울의 개괄적인 논증을 반복함으로써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다루고 있는 전체 주제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그 주제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세우는 데 자기의 강함을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세의 예식에 대해서 계속 논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들의 오만함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시기심을 해결한다.
그는 그들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이 의지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모든 교만한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또한 그분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하나의 동일한 기업에 대한 소망 가운데 결속을 이루고 서로 상대방을 온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고귀한 권위를 보장해준 자기의 사도직을 찬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자기가 그들 가운데 교사로서의 직분을 맡은 것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변호한다. 또한 그는 그들에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비추면서 그 근거를 몇 가지로 제시한다.
물론 그가 이 서신의 초반부에 밝힌 것처럼, 지금까지 여러 번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자 시도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헌금한 것을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은 거의 전체가 안부를 묻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여기저기에 감탄할 만한 훌륭한 가르침들이 있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기도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