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이 서신이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내가 주저하는 유일한 이유는, 내 찬사가 이 서신이 가진 위대함에 한참을 못 미칠 텐데 내가 하는 말이 오히려 그 빛을 가리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서신의 맨 처음 부분에서 내가 동원해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말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이 서신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로 서신의 주제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
주제를 살피다보면, 이 서신이 다른 많은 주목할 만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한 번도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적이 없는 한 가지 장점을 특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입증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서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성경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모든 보화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서신 전체가 너무도 꼼꼼하고 체계적이라서 시작 부분도 그 자체가 기교 있게 구성되어 있다. 앞으로 가면서 살펴보겠지만 저자의 뛰어난 재주는 여러 부분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요 논점을 추론하는 방식에서 그의 재주는 특별히 빛을 발한다.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고 나서 바울은 복음을 소개한다. 복음에 대한 소개는 믿음에 관한 논쟁을 동반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이것을 연결 고리로 삼아 믿음의 문제를 다룬다. 이렇게 하여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는 서신 전체의 주요 주제로 접어든다. 그는 5장 끝부분에 이를 때까지 이 문제에 대해 다룬다. 그러므로 1장부터 5장까지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의義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이 의는 복음을 통해 제시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인간은 죄 가운데 잠들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우쭐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미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의기소침해진 경우가 아닌 이상 자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인간은 욕정의 달콤함에 너무도 흠뻑 취해 있고 태평한 삶의 방식에 아주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깨워서 의를 추구하게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은 두 가지 일에 착수한다.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 납득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무감각함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다.
우선 그는 창세創世로부터 온 인류가 감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책망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에 나타난 탁월함을 보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때, 그들은 마땅한 존경을 표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생각으로 그분의 위엄을 더럽히고 손상시킨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이 경건하지 않음의 죄를 범했다고 비난한다.
경건하지 않음은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바울은 인간이 도처에서 저지르기 쉬운 가증스럽고도 무서운 행위들을 기록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악행은 하나님이 진노하신 증거들이며,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일부 이방인들은 외적인 거룩함이라는 망토로 자기들 내면의 사악함을 감추었다. 그들은 바울이 언급한 악행들에 대해서 책망 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정죄를 당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생각되었다. 바울 사도가 거짓된 거룩함에 대해서 언급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를 성자聖者라고 칭하는 이들에게서 이 거룩함의 가면을 벗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불러낸다.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까지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신 하나님의 심판 앞으로 불러낸다.
그런 다음 그는 구분을 지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 세운다. 이방인의 경우, 그는 무지無知해서 그랬다는 그들의 변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유죄라고 선언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에 관해서는, 그들이 자기들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것, 즉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들이 성경을 범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이상, 그들이 자기들의 사악함을 부인否認할 길은 없다. 이미 하나님의 입을 통해서 그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도 있을 법한 내용에 대해서 선수를 쳐서 막는다.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다면, 그들에게 거룩의 표가 되는 하나님의 언약이 깨졌을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 미리 막는다.
여기서 먼저 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님을 밝힌다. 이는 그들이 불성실하여 그 언약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고 있는 불변성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 언약이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특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한 것이지 그들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특별한 자격에 관한 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과 동일한 수준에 있는 셈이다. 이제 그는 성경의 권위를 사용하여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인임을 증명한다. 또한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도 약간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