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깊이 존경하는 시몬 그리네우스께
제 기억으로는 삼년 전에 우리가 성경을 주석하는 최상의 방법에 대해서 서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 특별히 마음에 들어했던 방법이 그 당시 제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선호했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알기 쉽고 간결하게 해석하는 것이 주석가의 특별한 미덕이라는 점에 우리 둘 다 공감했었지요. 자신이 해석하는 성경 저자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은 주석가의 유일무이한 과업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주석가가 독자들을 성경 저자가 의도하는 바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그만큼 주석가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주석가로서 지켜야 할 선線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이런 소망을 함께 품었지요. 오늘날 성경 주석이라는 이 과업을 통해서 신학의 대의大義를 성취하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해석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길고 장황한 주해로 독자들을 너무 지치게 하지 않을 그런 주석가가 나오기를 바라는 소망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거기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저는 간결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여전히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워낙 다양해서 각자 마음에 들어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저의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스로의 판단을 따르도록 하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의 표준을 따르도록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간결함을 선호하는 우리는 좀더 길고 광범위한 성경 주해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하지 않거나 경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우리가 너무 짧고 압축된 주해를 한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를 받아들여줄 것입니다.
저로서는, 성경을 주해하는 일과 관련한 저의 수고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어떤 선한 일들을 이룰 수 있을지 알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저는 그 당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주석 방법으로 보였던 그 방법대로 제가 로마서를 주해했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이야기했던 그 모델을 지향하기 위해서 저의 글 쓰는 양식樣式을 수정하려고 애썼습니다. 제가 이 일을 얼마나 잘해냈는지 판단하는 것은 제 몫이 아니므로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같은 학자들에게 맡기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특별한 뜻을 품고 바울의 로마서를 주해하고자 하는 위험을 감행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것 같습니다. 뛰어난 학식을 갖춘 많은 학자들이 이 서신을 주해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나은 주석서를 내놓을 만한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저는 제 수고가 어느 정도의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처음에는 저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걸출한 사람들이 행한 이 과업에 손을 댐으로써 주제넘는 짓을 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이 서신을 다룬 많은 고대 주석들과 현대 작가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일은 그들이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장 적합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대 주석가들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경건함과 학식과 고결함으로 인해 얻게 된, 그리고 그 당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여해준 권위가 너무도 놀랍기 때문에, 그들이 이룬 어떤 일도 함부로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생존해 있는 주석가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저의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멜랑크톤(Melanchthon, 1497~1560. 루터의 친구이자 후계자이며 독일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은 학식과 저술뿐 아니라 온갖 지식을 구비하는 면에서 탁월함을 보임으로써, 그보다 앞서 주석을 냈던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에게 많은 빛을 비추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은 듯합니다. 그런 부분들을 상세하게 다룸으로써, 그는 보통의 이해 수준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는 많은 문제들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고 있습니다. 멜랑크톤에 이어서 불링거(Bullinger, 1504~1575. 스위스의 종교개혁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크나큰 인정을 받은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불링거는 쉬운 표현을 써서 교리를 해석했으며, 그것 때문에 널리 칭송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처(Bucer, 1491~1551. 독일의 종교개혁가)가 있는데, 그는 자신의 저작을 출판함으로써 로마서 주석에 대한 결정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심오한 학식과 풍부한 지식, 날카로운 지성과 방대한 독서, 그리고 당대의 어느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다른 많은 방면에서 탁월함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학자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성경을 해석하는 면에서 그보다 더 정확하고 더 공을 들인 사람이 없기에, 그는 이런 특별한 명성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인정하는 이러한 학자들과 경쟁하려 한다는 것은 순전히 질투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명성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얻게 된 평판과 권위를 그들이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한 일 중에서 완벽하게 행해질 일은 없기에, 후대 사람들이 앞선 세대 사람이 이루어놓은 일들을 다듬어서 더 빛나게 만들거나 예를 들어 설명할 만한 여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에 대해서 감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저의 이 주석이 얼마간의 유익을 끼칠 것이라 생각하고, 제가 이 일에 착수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공적公的 선을 위해서라는 것을 밝힐 뿐입니다.
나아가, 제가 주해하는 데 다른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다른 주석가들과 경쟁하려 한다는 불쾌한 비난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히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멜랑크톤은 주해할 때 중요한 항목에 대해서 설명함으로써 자기가 의도한 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차적인 과업에 마음을 쏟느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많은 부분들을 간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이 간과한 부분을 다른 사람들이 자세히 살피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부처의 주석은 너무 장황해서 다른 일들로 분주한 사람들이 빨리 읽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그 내용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에 이해력이 뛰어나지 않고 주의력이 떨어지는 독자들은 쉽게 읽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문제를 다루든 간에, 그는 놀랍고도 풍부한 지성 덕분에 너무도 많은 것들을 생각해내기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멜랑크톤은 모든 본문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은 반면, 부처는 짧은 시간 내에 읽어내기 버거울 만큼 장황하게 모든 부분을 다룬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제가 하고자 하는 바가 어떤 경쟁의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들과 다른 학자들의 뒤를 이어서 특정 성경 본문들을 단편적으로 모아서 다루는 것이 유익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구절들을 빠짐없이 주석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전자를 선택한다면 제가 지적知的 능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자를 선택한다면 제가 모든 주석가들, 적어도 그들 중 일부가 이미 앞서 언급한 많은 내용들을 반복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들 주석가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 가지각색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순진한 독자들이 큰 곤란을 겪게 되지요. 그들은 누구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할지 머뭇거립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일 제가 가장 좋은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곤란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주석 작업에 뛰어들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독자들의 판단은 다소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저는 모든 요점을 간결하게 다루기로 했습니다. 이는 독자들이 다른 주석에 있는 내용을 제 주석에서 읽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컨대 저는 이 로마서 주석이 여러 세부 사항들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이 주석이 얼마나 유용할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호의적인 사람이라면, 제 주석을 읽고 나서 제가 겸허하게 약속드릴 수 있는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때로 저는 다른 주석가들과 의견을 달리합니다. 아니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과 다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저를 너그러이 봐주셔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해석하는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그 존중하는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맑은 정신으로 지극히 신중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하지 않는다면, 그 위엄이 다소 손상됩니다.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을 더럽히는 행위를 죄라고 할 때, 세상 만물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하지 않은 손으로 혹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손으로 다루는 자는 그 누구든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장난하듯이 성경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은 파렴치하고도 참람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때 많은 주석가들이 그렇게 행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깨닫게 되는 사실은, 경건을 사모하는 열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진리를 논하는 일에서도 경외와 절제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결코 모든 항목에서 의견 일치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다루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온전하고 완벽한 지식을 갖출 만큼 그분의 종들을 축복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시는 이유는 첫째로 우리를 끝까지 겸허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다음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동료들과의 교제를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일에서 영원한 일치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 더없이 바람직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배 주석가들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게 될 때, 뭔가를 새롭게 해보고자 하는 일시적인 기분에 자극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자 하는 마음에 이끌리거나 어떤 증오심에 불타서 혹은 야망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필요에 이끌려서, 그리고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주해할 때도 우리는 이와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관해 가르칠 때는 의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서 좀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이 이 영역에서 일치된 마음을 가지기를 특별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주석을 읽게 될 독자들은 제가 이 두 가지 면을 모두 깊이 고려했음을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 스스로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거나 판결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기에, 이 일은 당신 몫으로 기꺼이 남겨두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많은 부분에서 당신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긴다면, 저는 모든 부분에서 당신의 판단을 따라야 마땅합니다. 이는 긴밀한 교제 덕분에 제가 누구보다도 깊이 당신을 아는 까닭입니다. 사실 상대에 대해 너무 잘 알면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약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모든 학자들이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듯이, 당신에 대해서 깊이 알고 나서 당신에 대한 저의 존경심은 더 커졌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539년 10월 18일
스트라스부르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