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메시아로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마 21:1-11).
스가랴서 9장 9절.
전사들이 거의 전적으로 타던 말 대신 일반 백성들이 타던 나귀를 타신 것(마 21:5-7).
나귀 주인이 혹시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마 21:3)고 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대목.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 12:19).
그로부터 약 40년 뒤에 로마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베다니에서(막 11:11).
보통은 무화과 잎이 나오기 전에 열매가 먼저 맺혔기 때문에(막 11:12-14).
허세만 부릴 뿐 아무 결과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
성전에서 짐승들을 매매하는 장사꾼들과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반 세겔’의 금액을 헌금으로 바쳐야 했다. 이에 환전상들이 타국에서 온 유대인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터무니없는 환율로 돈을 바꿔주는 장사를 하였다)들을 내쫓으시는 일(막 11:15).
그렇다. 사역 초기에 하신 적이 있었다(요 2:13-17).
예수님이 마지막 공적 가르침을 베푸신 날.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인간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하루 종일 성전에서 보내셨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그렇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조건에서 그렇다(약 4:3 ; 요일 5:14 참고).
어떤 사람과 등을 진 일이 있으면 상대방을 꼭 용서해야 한다는 것(막 11:25).
세례 요한의 권위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치심으로써(마 21:23-27).
그들이 세례 요한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로되,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무익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할 마음도 없었고, 그렇다고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공언했다가는 백성들에게 화를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에(마 21:25,26).
행동을 약속하고 실행하지 않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는 교훈.
만물의 통치자이자 아버지이신 하나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종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 힘쓴 일꾼들과 선지자들을 가리키고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사람들.
누가복음 14장 16-24절(96장 27-30번 문답 참고).
유대인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과 교사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버려진 사람인 이방인들.
집 주인이 자기가 베푼 잔치에 필요한 준비물로 손님들에게 주어 다른 옷들 위에 입게 한 옷.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뜻한다(슥 3:4 ; 계 19:8).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옷을 입는 것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유일한 자격요건이고, 주인이 손님들 모두에게 공짜로 준 선물이고, 그것을 입지 않는 것이 고의로 주인을 모욕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유대 법률이나 로마 법률에 저촉될 것이 자명한 대답을 예수님에게서 끌어내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하였다(마 22:15-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우리 모두가 정부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현재의 정권에 찬성하지 않을지라도 정부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하는 의무도 다해야 한다는 것.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 막 12:29,30 참고).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 22:39).
첫째 계명은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을 종합한 것이고 둘째 계명은 나머지 여섯 계명을 종합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또 다윗의 주(主)가 될 수 있느냐고 질문하심으로써. 그 질문은 메시아에 관한 바리새인적 관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마 22:42-46).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꾸짖으셨다(마 23장).
예수님은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지만 또한 사랑으로 꾸짖으셨다.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그들에게 깨우쳐주심으로써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죄악 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 외적인 형식과 의례에 관심을 집중한 것. 그들의 지위와 행위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했음에도 오히려 잘못된 길로 인도한 것.
바리새인들이 출애굽기 13장 15,16절과 민수기 15장 38,39절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 착용하던 것으로 율법을 기록한 양피지 조각들을 넣은 작은 상자를 가리킨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상징을 차고 다니면서 정작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지니기를 거부하는 것은 외식하는 죄였다.
바리새인들의 장황한 기도는 신령함을 가장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한 기도였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큰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하였다(마 6:5-7). 반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기도의 영(spirit)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군중 가운데 있을 때라도 참된 은밀한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수 있게 하라는 의미이다.
가난한 중에서 모든 소유를 드릴 정도로 그녀는 진정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으로 드렸기 때문에(막 12:41-44).
예수님이 헌금을 바치는 과부의 동기(動機)를 아셨기 때문에 칭찬하신 것이므로.
칭찬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 바쳐진 ‘작은 것’이 그 사람의 사정에 비하면 ‘작은 것’이 아닐 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향한 사랑으로 바쳐진 것일 때.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그리스인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 사건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온갖 시련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것이 밀의 싹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한 알의 밀로 죽어야 그것으로부터 밀이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어 십자가에서 죽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부류의 사람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계 7:9).
절대 그렇지 않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렇게 말한 까닭은, 유대인들이 마음을 계속 악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헤롯 대왕(86장 12번 문답 참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약 40년 후,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미혹하겠지만, 제자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마 24:5,6).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 복음의 보편적인 선포를 약속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를 가지겠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니엘서 12장 11절의 인용구로,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는 로마군대의 깃발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군대의 깃발에는 우상들의 상징이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마 24:34).
우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도 잠을 잤다(마 25:5). 미련한 다섯 처녀가 신랑에게 외면을 당한 것은 잠을 잤기 때문이 아니라 신랑을 맞을 준비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만일 기름을 나눠주었다면 아무도 등불을 밝히지 못하였을 것이고 결국 신랑에게 예를 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 이 기름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오직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심령에게만 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 므나의 비유에서는 동일한 금액(동등한 능력과 기회)을 받았고, 달란트 비유에서는 서로 다른 금액(서로 다른 능력과 기회)을 받았다.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노동자의 20년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능력과 기회의 불평등이, 우리가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장 잘 활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없다. 모든 민족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 소집될 것이다(마 25:31-46).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0,45).
그리스도를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느끼는지 살핌으로써.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동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은 30(당시 노동자의 6개월 품삯)에 예수님을 배신하기로(마 26:1-5,14-16).
아무 기록이 없다. 아마 조용히 물러나 기도하면서 보내셨을 것이다.
가룟 유다가 그 장소를 알게 되면 미리 준비하여 그곳에서 예수님을 체포할 것이므로.
어린양, 발효시키지 않은 떡, 쓴 나물, 포도주, 야자열매와 건포도와 다른 재료들로 만든 양념(17장 2번 문답 참고).
그들은 누가 가장 크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눅 22:24-30).
길거리에서 묻은 먼지를 서로의 발에서 씻어주는 행위(요 13:1-17).
그렇지 않다. 당시 그들이 ‘샌들’을 신고 생활하였고 또 먼 길을 걸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인들이 하는 천한 일이었다.
섬김을 받고 싶은 만큼 기꺼이 섬겨야 할 것이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무엇이든지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교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음 받아야.
꼭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언제나 서로를 위해 가장 천한 일들도 기꺼이 하기를 바라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자들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요 13:21-30).
식탁 주변에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먹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곳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는 뜻.
떡 한 조각을 양념에 적셔 배신자에게 주심으로써(요 13:26).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랫사람에게는 크나큰 영예였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을 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들은 배신 사건이 언제 일어날지,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성만찬 의식(눅 22:19 ; 마 26:26-28).
그렇지 않다. 그는 예수님께 떡 조각을 받은 뒤에 즉각 그 자리를 떠났다(요 13:30).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것. 예수님과의 교제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로 우리의 영혼이 강해지고 새 힘을 얻기 위한 것(고전 11:23-26 참고).
예수님의 작별설교 혹은 고별강론.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35).
그렇다. 슬픈 차이가 있었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예수님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의 표정을 보고 회개하였고(눅 22:61,62), 사도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섬기면서 여생을 살았다.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
예수님을 통해(요 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예수님의 단언으로(요 14:8,9).
그렇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해주신다(요 14:13).
성령.
그렇지 않다. 성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요 14:16).
성령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데, 세상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따라서 성령도 모르기 때문에(요 14:17).
예수님 명령에 지속적으로 순종하는가 하는 것과 우리 안에 성령이 있는가 하는 것으로(요 14:21,23).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겠지만,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악의 모든 세력들을 다스리는 사탄.
예수 그리스도.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만(요 15:1-5).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가 버려지는 것처럼 쓸모없는 가지로 버려질 것이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명하시는 대로 행할 때(요 15:14).
가능하지 않다. 세상 재물과 명예와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요 15:18-20).
예수님의 이적을 목격하고 그 가르침을 듣고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질게 박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요 16:28-30).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요 16:33).
인간을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해하신 아버지로 참되게 아는 것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이다(요 17:3).
육신과 영 둘 다 완벽하게 파멸시키는 죄에 급속히 빠져든 가룟 유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라는 간청. 이 간청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점진적인 연합과 합동 안에서, 초교파적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참된 기독교 사역 안에서 현재 응답을 받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