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마태복음 6장 9-13절. 약간 다르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진실성이지 말이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들과 한목소리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귀한 일이고 또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이 기도가 참된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무엇이든 주실 것이라 믿고 진실하고 끈기 있게 구하는 것.
이 땅의 아버지들(눅 11:11-13).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행동과 나쁜 원칙들.
하나님은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신다는 예수님 말씀으로(눅 12:6,7).
이 땅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당당히 시인했던 사람들을,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주실 것이라는 약속(눅 12:8,9).
세상의 재물과 쾌락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이 땅에서 죽음으로 데려가리니”라는 뜻.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위한 선한 일로 충만한 것.
미래에 대한 과도한 불안과 염려. 오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하게 훼방하는 내일에 대한 지나친 걱정들.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귀한 것들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뜻.
우리 주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재림(눅 12:35-48).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할 책임.
그렇지 않다. 예수님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눅 13:1-5).
그렇지 않다.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과 세상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눅 13:24-30).
그렇지 않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그런 일들을 하려는 사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께 맡기는 자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든지 기꺼이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멸망하기를 바라시지 않지만(요 3:16),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거부하거나 태만히 한 사람들은 거부하실 것이다(눅 13:25-27).
진리의 빛을 먼저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나중이 되리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세상 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거나 그런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어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는 이 땅에서 가장 하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1) 안식일을 참되게 지키는 법.
2) 자기를 높이는 행위는 합당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
3) 복음 잔치에는 기꺼이 참석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
꼭 필요한 일과 자비를 위한 일. 주변 사람들에게 영적, 신체적으로 실제적인 유익을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눅 14:1-5).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부가한 조항들로, 지나치게 자세하고 임의적이라서 그것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모든 손님들이 저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에(눅 14:7).
잔치에 가면 겸손한 마음으로 끝자리에 앉을 것이며, 잔치를 베풀 때에는 대접받은 대가를 갚을 수 있는 부자들을 부르지 말고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는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불러야 한다. 그러면 부활의 날에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눅 14:8-14).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유대인들.
그들이 이미 초대를 받아 수락했으면서도 막상 잔치에 갈 시간이 되자 하나같이 못 가겠다는 핑계를 댔기 때문에.
구약성경은 메시아가 어떻게 와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준비를 하고 예수님의 초대에 응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유대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
잃었다가 찾은 것들의 비유.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예수님 말씀으로(눅 15:7).
돈을 모두 탕진하고, 먹을 것이 없어 거의 죽게 되는 지경까지(눅 15:13-17).
마치 전에는 미치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제 제정신을 차렸다는 뜻.
제 아버지의 하인들 가운데 하나로 자기를 대접해달라고 말하겠다고(눅 15:19).
고민하지 않았다. 그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기쁘게 받아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녀들을 받아주신다(눅 15:20-24).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자녀로(눅 15:24).
선하든 악하든 어떤 방법으로든지 친구를 사귀라는 세상의 원칙.
재산 축적을 인생의 주된 목표로 삼는다는 뜻.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마음으로 인간을 판단하신다(눅 16:15).
물질을 올바로 사용해야 하며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는 교훈.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친한 친구.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눅 10:38-42 ; 요 12:1-8).
그렇지 않다. 나사로는 ‘엘르아살’이라는 이름의 헬라어식 표기로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시간과 기회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갖고 있는 동안 이용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 백성들이 깨어나 새 생명에 이르는 잠(요 11:11-13).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그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
신자들이 예수님과의 결합에 의해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므로(요 11:25,26).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들(살전 4:16).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신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살전 4:17), 혹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의미.
나사로를 매우 많이 사랑하셨다는 것.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기 때문에(요 11:5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