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돌아가셔서, 거기에서 얼마 동안 사역하셨고(이때의 예수님 행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눅 9:51).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통행을 거부한 사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차 자신이 당하게 될 모든 고난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유대인들을 미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환대해야 할 보편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종교 지도자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사실상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몇몇 제자들은 엄히 징벌하라고 요청하였지만 예수님은 온유함의 본을 보이셔서 징벌하지 않으셨다(눅 9:54-56).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
예수님이 가려고 하는 모든 마을로 둘씩 짝지어 보내셔서, 예수님을 위한 길을 준비시키려고(눅 10:1-24).
고대 근동의 인사법은 형식적인 절차들이 많았고 또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근동지방의 관습으로, 어떤 도시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벗어버린다는 뜻.
그렇다. 그들의 전도사역뿐만 아니라 육신을 위한 자상한 배려도 드러나 있다.
가버나움이 당대 매우 번영한 도시로서 예수님의 직접적인 사역과 가르침을 받는 특권을 누렸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꾼들의 말을 듣는 것이 곧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의 일꾼들을 배척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눅 10:16).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과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눅 10:20).
물론이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온 마음을 다하여 진정으로 섬기지 않는 모든 시대와 나라에 적용될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겸손하여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들(눅 10:21).
영혼의 안식을 얻는 축복.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진정한 이웃이란 국적이나 종교를 불문,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이틀 품삯이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치유하신 이적.
개인의 죄의 결과. 개인의 죄에 대한 형벌(요 9:2).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요 9:3).
하나님을 위해 일할 시간으로서의 삶, 삶의 수고를 쉴 시간으로서의 죽음.
유대인들의 종교모임 참석을 금지당하는 것, 그래서 개인적으로 수치를 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 9:25).
선한 목자의 비유.
우리가 생각하는 축사(畜舍)가 아니라 목초지 가운데 지붕 없이 울타리만 쳐 있는(밤에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
예수 그리스도 자신(요 10:9).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고 모든 해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약속(요 10:9).
자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요 10:10,11).
양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양들을 위해(혹은 양들 대신에)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 10:10,11,15-18).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하나님께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왕에게서 성전을 구해주신 일(BC 165년)을 기억하여 유대인들이 지키던 절기.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요 10:27,28).
하나님의 말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