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헤롯을 담대하게 꾸짖은 신실함 때문에(막 6:17,18).
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있었고 또 세례 요한이 옳다고 그의 양심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막 6:20).
왕의 신하의 아들이 가진 병을 한마디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이적(요 4:46-54).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기 아들이 회복되었음을 확신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믿음.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사렛(눅 4:16).
이사야서 61장 1-3절.
두 가지 방법 중 어떤 것으로 해석해도 진리가 훼손되지 않는다.
죄로 인한 경건한 슬픔으로 인해 심령이 부서지고 상한 사람들.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 능력이 없기 때문에 혹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은혜의 때.
예수님을 그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눅 4:22).
다른 민족들을 멸시하는 유대인의 교만 때문에.
갈릴리 호수 인근의 가버나움(눅 4:31).
주변에 모여드는 군중에게 말씀을 더 효율적으로 전하시기 위해서.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의 배(마 4:18 ; 눅 5:3).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히게 하는 이적(눅 5:4-7).
예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앞에서 자신이 큰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막 1:16-20).
그렇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그들은 생업을 버리고 모든 시간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바치라는 부름을 받는다(막 1:16-20).
세상 사람들을 복음의 그물로 세상에서 끌어내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의미.
귀신들린 사람을 회당에서 치유하는 이적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이적(막 1:21-31).
예수님이 고쳐주시자마자 그녀가 시중을 들었다는 사실에서(막 1:31).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막 1:32-34).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것이나 고침을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해가 저물어야 안식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랬다가는 예수님이 귀신들과 같은 부류로 비쳐질까봐 금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 성경은 예수님이 오랜 시간 진지하게, 밤낮으로, 특히 중대한 의무나 사건을 앞두고 기도하셨다고 자주 언급하고 있다(막 1:35 ; 눅 6:11,12).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사건.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치유의 사례가 극히 드물어 거의 불치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의 신성의 정결함으로 인해.
사지가 마비되는 병 혹은 그것과 유사한 질병(막 2:1-12).
그 환자의 친구들이 진흙으로 된 평평한 지붕에 구멍을 뚫고, 그 환자를 예수님 발치에 달아 내렸다(막 2:4).
그렇지 않다. 당시 유대인들은 문으로 들여올 수 없는 물건들을 지붕에 구멍을 내어 달아 내리곤 하였고, 유대인들의 가옥구조는 지붕을 수리하기 쉽게 되어 있다.
“나에게는 용서의 말을 하는 것과 치유의 말을 하는 것이 똑같이 쉽다. 그러나 너희는 치유의 말의 능력만 인정할 것이다!”라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이므로(빌 2:6,7 ; 사 43:25).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생각을 알고 계셨다는 것(막 2:6-8).
세리 마태 혹은 레위(마 9:9 ; 막 2:14 ; 눅 5:27-29).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다.
세리인 자기 친구들과 이웃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막 2:15).
베데스다에서 무력한 병자를 치유하는 이적(요 5:2-47).
예루살렘에 있는 간헐천.
연못에 물결이 일 때 치유의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요 5:4).
이 구절은 다른 모든 요한복음 사본들에는 나와 있지 않은 구절로 후대에 필사한 사람이 넣은 논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요한의 기록이라면, 간헐천에 대한 당시 대중의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의 천사는 ‘사자’(使者)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천상의 존재’를 의미하기 위한 의도로 쓰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그러므로 율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에(요 5:9,10).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여,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았기 때문에(요 5:17,18).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요 5:14).
예수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심판을 맡기셔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람들의 높임을 받게 하셨다(요 5:22,23).
그렇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 23:25).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일종의 추수로 간주되어 안식일에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안식일에도 희생제물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안식일은 땅의 수고를 쉬는 휴식의 날로(창조 때부터 그랬다. 창 2:2-3),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날로 정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