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는 오직 한 왕에 대해서만 기록한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불렸던 다윗이다(삼상 13:14). 하지만 다윗은 이웃 여인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우리는 이런 다윗의 모습을 통해 두 가지 상반된 삶의 방식을 볼 수 있다.
사무엘하 1-10장에서 다윗은 만사가 형통했다. 왕국은 날로 확장되었고(애굽에서 유프라테스까지), 이스라엘은 근동의 강자(强者)로 급부상했다. 또한 다윗이 새로 건립한 수도이자 예배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막대한 부(富)와 조공(租貢)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사무엘하의 나머지 부분은 이전 부분과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이스라엘은 외적들에게 빼앗은 영토를 도로 빼앗기기 시작했고, 다윗은 자기 아들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왔으며, 심지어 그 아들은 제 아비의 후궁들을 욕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윗은 근친상간과 가족 사이의 유혈을 보며 남은 생애를 보내야 했다.
기쁨의 삶을 살던 다윗이 통한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자기 죄의 결과였다. 다윗은 자신의 더러운 속임수를 은폐하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가중되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죄를 지적받고 난 뒤에 눈물로 통회하고 회개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임을 입증해보였다(시 32,51편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서받아도 그 죄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셨다(삼하 12장).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한 뒤,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징계도 전했다.
“밧세바와의 부정한 관계를 통해 낳은 아들은 죽을 것이며, 칼이 네 집에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네 아내들을 빼앗아 너와 가까운 사람
에게 주어서, 그가 대낮에 네 아내들을 욕보이게 할 것이다.”
우리는 사무엘하 13-24장에서 이 모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순간이라도 하늘의 보좌를 거역하는 죄는 장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사탄은 그런 순간의 죄가 낳는 장기적인 결과를 숨기는 데 명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값없이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자기 백성들이 그 사실을 악용하여 마음대로 죄를 짓고 쉽게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런 태도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주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외아들을 죄인들에게 내주어 그들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그 방법을 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은 채 살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택할 것인지 악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시지만 또한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신다. 만일 내가 은행을 털고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훔친 돈을 돌려주거나 감옥살이를 함으로써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 만약 내가 일평생 담배를 피우고 나서, 폐암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해보자. 그러나 그런 기도가 폐암의 위험을 완전히 차단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쁜 습관이 질병을 불러오듯 용서받은 죄에도 결과가 따른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의를 품고 우리의 죄를 억지로 용서하신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징계와 싫어하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상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징계하신다(잠 3:11,1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양자(養子) 삼으신 모든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부모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분명한 가르침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잘 이해했는지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마다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를 어떻게 위로하셨는지 보라. 밧세바와의 부정한 관계로 낳은 아기는 죽었지만, 다윗은 그 아기가 하늘나라에 갔다는 것을 확신했다(삼하 12:23). 다윗과 밧세바가 그 다음에 낳은 아기는 솔로몬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택하신 사람이었다. 솔로몬은 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지혜롭고 부유한 왕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새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목하라.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의 “여디디야”라는 별칭을 붙여주시기도 했다(삼하 12:24,25).
역대상은 다윗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범한 죄를 언급하기는커녕 암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밧세바와 저질렀던 부정한 사건을 이 신성한 기록에서 완전히 빼신 것이다.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신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
죄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의 결과 가운데 살고 있던 다윗과 밧세바 두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확실하게 사랑을 확인시켜주실 수 있었을까? 여기엔 진정한 이율배반의 원칙,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두 진리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지만(시 103:12),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실물 교육 차원에서 우리의 죄는 용서해도 징계는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삼하 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