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손자 야곱이나 증손자 요셉에 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그의 아들 이삭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단편적 묘사만을 제공한다. 창세기 26장이 전적으로 이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삭에 대해 아는 것들 대부분은 다른 가족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리스도를 향해 내려가는 아브라함의 가계(家系)를 지속시키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히브리 민족의 계보’를 참조하라).
이삭은 어머니가 90세, 아버지가 100세 때 기적적으로 태어났다(창 17:17). 열일곱 살 무렵, 그는 기꺼이 아버지에게 묶여 제단 위에 누웠다.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려지기 위해서였다(창세기 22장 참조). 그는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처럼 하나님과 제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제사를 막는 하나님의 다급한 음성을 정확히 포착했을 때, 어린 이삭은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중에 그는 부친의 믿음을 본보기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히브리 여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창 24장).
십대 시절에 나는 어떤 소녀 때문에 괴로워한 적이 있다. 그녀는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만큼 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다른 남자 친구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교통사고나 심장 발작이나 어떤 주권적인 섭리로 그 친구를 제거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면 할수록 내 자신만 더욱 비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제단을 쌓기로 결심하고(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짝사랑하던 그 소녀를 제단 위에 눕혔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최선의 일을 해주시리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기를 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내게 주시지 않더라도 나와 더 잘 맞는 다른 상대를 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다. 그 시간 이후, 짝사랑하던 그 소녀와 그녀가 좋아하던 남자 친구를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최선으로 인도해주시길 소망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몇 개월 동안은 그와 같은 제단을 몇 번이나 쌓고 또 쌓아야 했다. 의심과 불신앙이 찾아올 때면 나의 제단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진심과 헌신을 모르는 척하지 않으셨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제단 위의 그 소녀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은 아무 고통 없이 그저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들을 취해 가신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내게서 무엇을 가져가실 때마다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때때로 그 대체물의 배달이 지연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태어난 것이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한 것이나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것 등 여러 면에서 이삭은 그리스도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