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죄를 짓는 성향을 반복적으로 드러냈을 때(창 3-11장), 하나님께서는 이교(異敎)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람’(나중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뀜)을 택해 히브리 민족의 우두머리로 삼으셨다(창 12:1-3).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있는 하란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갔다. 창세기는 이렇게 에덴에서 출발해서 애굽에서 끝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히브리 민족을 택하신 까닭이 무엇일까?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더 우월했기 때문일까?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롬 4장).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과 받아주심을 ‘믿음의 선물’로 받아야만 했다(창 15:6).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경에 언급된 2,930명의 인물들 중에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대하 20:7 ; 사 41:8 ; 약 2:23), 유대인들과 아랍인들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랍인의 조상이고, 또 다른 아들 이삭이 유대인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며,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1-3). 아울러 그의 아들 이삭(17:19)과 손자 야곱(35:10-12)과 증손자 요셉(49:22-26)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믿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보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났으며, 고향에서 무려 1,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아내 사라가 늙어 아이를 낳을 수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붙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후손을 이삭을 통해 번성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히 11:17-19).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숫양을 공급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에 보상하셨다(창 22:10-19).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이 보인 위대한 ‘행함의 믿음’의 본을 따를 만큼 완벽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이야기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달을 향해 힘차게 치솟는 로켓과 같다기보다 오히려 경사진 레일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다(창 12:11-20, 20:1-18). 엄밀히 말해서 사라가 그의 이복 누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고의적인 거짓말은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기 전에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아랍인이 되고 이삭의 후손들은 유대인이 되었다. 이 두 민족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유혈 분쟁과 충돌을 빚고 있다. 아브라함의 죄가 오늘날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표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무익하다(약 2:26). 아브라함은 믿은 그대로 행했다.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 믿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까지도 기꺼이 바치려고 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당신의 믿음도 그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