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기 400년 동안 너무나 커져버린 파벌들로 인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신앙이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외적인 것들을 강조했다. 유대인들은 장황한 규칙들을 지킴으로써 성결에 이르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구약에서 흔히 저지르던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수뇌로 활약하는 산헤드린 공회(Sanhedrin)가 이스라엘의 종교 문제와 사회 문제를 결정하는 최고의결기관(주요 결정은 로마의 감시를 받아야 했지만)이 되었다. 아론 때부터 계보를 이어오던 신성한 제사장 직분은 고용된 제사장들로 대체되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제사장 직분을 거래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졌다. 회당은 로마제국 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위한 교육과 회합의 장소로서 계속 기능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6개의 유대 분파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유대의 구전(口傳) 전승을 떠받드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었으며 정교(政敎) 분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중류층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두개인은 상류층의 종교적,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사회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 부유한 합리주의자들은 부활과 영혼 불멸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과도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일을 하는 전문 집단이었다. 구약과 전통을 공부하며 백성들로부터 높은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시시한 문제를 놓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무척 증오했다.
헤롯당은 헤롯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념하던 ‘현상유지파’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반동주의자로 여겼다.
열심당은 헤롯당의 정적(政敵)으로서 로마에 항거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모세 시대처럼 신정(新政)으로 되돌려놓기를 원했다.
에세네파(Essenes)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극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쿰란 지역의 황폐한 동굴에 은거함으로써 유대 사회의 부패한 종교적 현실을 회피하려 했다. 1947년, 쿰란 지역의 한 동굴에서 그들이 간직해놓았던 사해사본(Dead Sea Scroll)이 발견된 이후, 그들은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사해사본에는 수도원 방식의 삶에 관한 훈련 지침은 물론 구약의 많은 부분(이전에 발견된 어떤 사본보다 더 오래된)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