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에 속기 쉽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쉽게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간 범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이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는 데 그다지 열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아래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순하고 너그러운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베드로와 바울은 장차 우리가 하늘의 법정에서 해명할 말들이 하늘의 완벽한 정의와 일치해야 할 것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벧후 3장 ; 고후 5:10,11).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강탈하여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말라기 선지자는 결단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말 3:1-15). 인간의 사악함은 내세에서는 물론 이생에서도 보응을 받을까? 학개 선지자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한다(학 1:1-11).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들을 자발적으로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거두어가실까? 열왕기하는 그렇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요가 아닌 매우 강력한 권고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강요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요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요나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를 꺼려할 때, 하나님은 그가 올바른 대답을 얻도록 사흘 밤낮을 가두어두셨다.
열왕기하에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백성들은 포로가 된다.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통일왕국에서 탈퇴한 이후, 총 18명의 왕들이 북쪽 열 지파를 다스렸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을 방문할 경우,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여 예루살렘 순례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단과 벧엘에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을 세우는 동시에 금송아지를 주조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신했다. 이에 레위인들은 항의하며 북이스라엘을 떠났다.
르호보암의 잘못이 여로보암의 잘못을 정당화했는가? 여로보암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을 무사히 잘 헤쳐 나왔는가? 두 질문의 대답은 모두 “아니다!”이다. 열왕기상 14장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서 무엇을 어떻게 직접 징발하셨는지 확인해보기 바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들을 탈취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어떻게 거두어가셨는지 열왕기 두 권과 역대기 두 권을 읽으면서 확인해보기 바란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황충’(말 3:11), 곧 사탄이 징수를 담당하도록 하게도 하신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208년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수확했는지 보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하나님을 떠나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그들을 다스렸던 19명의 왕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악했다는 것이다. 부자간의 왕위 계승은 아홉 차례나 깨졌고, 왕위가 공석(空席)으로 있었던 것이 두 차례 총 20년에 달했다. 19명의 왕 가운데 7명만이 자연사(自然死)했고, 한 명은 하나님께서 쳐서 죽었고, 두 명은 전투에서 전사했고, 한 명은 자살했고, 한 명은 2층에서 떨어져 죽었고, 여섯 명은 살해당했고, 한 명은 포로로 잡혀가 죽었다. 19명의 왕 가운데 12명만이 12년가량을 다스렸고, 한 명은 6개월, 한 명은 1개월, 어떤 왕은 단 일주일간 통치하기도 했다. 19명 가운데 10명이 큰 전쟁에 연루되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과 보화와 재능을 하나님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획득한 것일까? 그들에 대한 기록이 그들을 명백히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라.
하나님을 배신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왕하 17장). 니느웨에 본거지를 둔 앗수르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잔인한 약탈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포로들의 손과 발과 코를 잘라냈고 해골을 쌓아 큰 둔덕을 만들기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포가 말뚝에 묶이거나 산 채로 살갗이 벗겨져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앗수르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들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북이스라엘 백
성들은 실로 값비싼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왕국분열 이후 남유다는 다윗의 가계에서 나온 20명의 왕들이 통치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세월을 보냈지만, 그들 가운데 8명만이 하나님께 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읽으면서 각각의 왕들의 치세 동안에 하나님의 징벌과 보상이 어떤 비율로 배분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결국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하나님께서는 두 왕국에 ‘충분히’ 경고하셨다. 분열왕국 기간 동안 두 왕국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선지자들이 무려 3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 선지자들 가운데 예언서를 기록하지 않은 이들의 명단을 제시했으니 참조하라(이 표에 나오는 ‘오바댜’와 ‘스가랴’는 성경을 기록한 두 선지자와 동명이인이다). 선지자들은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속 외치는 한편,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맞게 될 정반대의 결과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지내야 할 햇수로 ‘70’을 택하신 것일까? 단지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12 ; 29:10)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남유다 백성들이 어떤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가 70년의 형벌을 불러온 것일까?
그 대답은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성경의 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역대하 36장 20절과 21절의 요점은 이렇다. 이 땅이 황무해져서 70년 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찾아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820년이 넘도록 도둑질한 ‘안식’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모두 따져서 그들의 형벌 기간을 70년으로 정하셨다는 뜻이다!
그들은 땅과 사람들을 7일마다 하루씩(안식일), 7년마다 한 해씩(안식년), 50년마다 한 해씩(희년) 쉬게 해야 했지만(레 23-26장), 대대손손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어겨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런 속임의 순환 사슬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과연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돌연 벼락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모세 시대에는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돌에 맞아 죽었다는 것(민 15:32-36)을 기억했을까?
초등학교 시절, 나는 완전범죄를 꿈꾼 적이 있다. 우리는 오고 가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곳으로 소풍을 떠났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자전거를 타고 출입이 금지된 웅덩이에서 수영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 리 없었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쩌나 불안하여 재미있게 놀지는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 엉덩이에 빨갛게 회초리 자국이 생긴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지만, 큰형은 줄곧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안식’을 전국적으로 범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그들의 걱정과 불안감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조롱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묵인(默認)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벧후 3:9).
하나님이 그들을 참아주신 까닭은 단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환경을 통해 그들을 오랫동안 책망하신 것은 그들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서였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의 빚을 정확히 계수해오셨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안식’을 착복한 그들의 빚이 축적되어 70년의 세월로 갚아야 할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직접 거두신 것이다.
당신은 매우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큰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갔다는 생각에 자족해 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스러운 얼굴로 다닌 적은 없는가? 그 일에 대해 정말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또 모든 것을 기록하신다는 사실을 열왕기하의 교훈을 통하여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의 ‘묵인’이라고 느껴지는 잠깐의 기간 동안, 하나님은 당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인내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다. 장차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돌려야 할 것들을 직접 거두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