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왕이다(행 13:22). 그러나 다윗은 이웃 여인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바로 그 시점을 기준으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무엘하 1장에서 10장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갔다.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의 새로운 패자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그 영역 또한 어느 때보다 확장되어 애굽에서 유프라테스에 미쳤다. 또한 다윗이 세운 새로운 수도이자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막대한 부와 조공물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사무엘하 13장부터는 모든 상황이 앞부분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며 진행된다. 이스라엘은 정복한 땅을 외적들에게 도로 빼앗겼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부친의 권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도성 밖까지 추격했다. 또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제 아비의 후궁들과 동침했다. 이와 같이 다윗은 근친상간과 가족 간의 유혈 참극을 목격해야 했다.
어느 날 밧세바와 가졌던 쾌락적인 죄의 결과로, 다윗의 인생은 기쁨의 삶에서 통한의 삶으로 바뀌었다. 다윗은 자신의 더러운 발자국을 덮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더욱 깊어졌다.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를 대면하여 자신의 중대한 죄악을 지적받았을 때, 가슴을 치며 회개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임을 입증했다(시 32,51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셨다(삼하 12장).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다고 말했지만 간통으로 낳은 아이는 반드시 죽을 것이며, 칼이 다윗의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이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백주에 욕보일 것이라고 선고했다. 사무엘하 13장에서 24장까지는 이 모든 예언들이 하나하나 성취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한 순간의 죄악이 가져오는 장기적인 결과를 숨기는 기만의 명수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값 없이 오는 것이므로 죄 또한 값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식의 삶을 사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이는 갈보리 십자가에 대한 명백한 왜곡과 모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 외아들의 목숨을 내놓으셨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십자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면, 완전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외아들을 희생하는 것만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고 멀쩡히 살아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삼하 1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시지만 또한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도록 하신다. 만약 내가 은행을 턴 후에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용서해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감옥에 가거나 강탈한 돈을 변상함으로써 사회에 진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일평생 담배를 피워온 사람이 갑자기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폐암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습관이 질병을 몰고 오는 것처럼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못마땅한 마음으로 억지로 용서하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싫어하심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모든 자녀들을 징계하신다(잠 3:11,12).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된 모든 믿는 자들의 선한 아버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가르침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지 시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실 때 언제나 사랑을 다시 확신시켜주신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를 어떻게 격려하셨는지 보라. 그들이 낳은 아기는 죽었지만, 다윗은 세상을 떠난 그 아기가 천국에 갔음을 확신했다(삼하 12:23).
다윗과 밧세바가 다음에 낳은 아이는 솔로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삼기로 선택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의 어떤 왕보다도 더 지혜롭고 부유한 왕이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뜻으로 “여디디야”라는 별명을 지어주셨다(삼하 12:24,25).
역대상은 다윗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다윗이 생전에 범했던 한 가지 죄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 한 가지 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다윗이 밧세바와 저질렀던 부정한 사건은 이 신성한 기록에서 완전히 빠졌다. 인간들이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받은 뒤에 묵묵히 징계를 감내한 두 자녀(다윗과 밧세바)에게 하나님께서 그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줄 수 있었을까? 여기에 정말 이율배반적인 요소(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비중을 지니고 있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지만(시 103:12),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분명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 죄는 용서해도 징계는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삼하 12: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