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에 대해 말합니다. ‘신약의 잠언’이라고도 하지요. 야고보서는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시련을 겪은 책입니다. 특히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신약 성경에 넣는 것조차 거부했지요. 그 내용이 마치 로마서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됩니다. 그것도 우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1:1, 2:1). 또한 예수님의 부활과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수훈을 23회나 인용합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구약 성경에 조예가 깊고, 지혜의 문학에 정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은 1장 1절에서 말한 것처럼 야고보가 기록했습니다. 성경에는 ‘야고보’라는 이름으로 다섯 명이 나옵니다.
● 가룟 유다가 아닌 열두 제자 중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눅 6:16),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 열두 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 막 3:18, 눅 6:15, 행 1:13),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막 2:14). 이 구절을 볼 때 마태와 레위는 동일 인물입니다. 레위도 알패오의 아들이기에 마태와 야고보는 형제입니다.
● 작은 야고보(마 27:56, 막 15:40),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 열두 제자 중에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형제 야고보(마 10:2, 막 3:17, 눅 6:14, 행 1:13), 그는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아그립바 1세에 의해 A.D.44년에 순교했기에 이 책의 저자가 아닙니다.
●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며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었지요. 열두 사도는 아니나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입니다(갈 1:19, 2:9). 끊임없이 기도하기에 ‘낙타 무릎’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야고보서는 갈라디아서와 함께 가장 먼저 기록된 서신서입니다.
1장 2-15절에 ‘시험’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이는 실제로 의미가 다른 세 단어입니다.
첫 번째,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시련 혹은 연단으로서의 시험test입니다(1:2-4).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도 이것입니다(창 22:1).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우리를 성장하고 부요하게 합니다.
두 번째,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시험trial입니다(1:12). ‘고난’ 또는 ‘환난’이라고 말합니다. 이 같은 시험을 견디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어두움의 영으로부터 오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십니다. 이러한 시험이 올 때 환영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큰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으로서의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1:13-15).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기에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은 즉시 대적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시험에 들어 죄를 범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이기 때문입니다.
16-18절은 하나님의 두 가지 면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며, 늘 최고의 것을 주십니다. 또한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것은 천문학의 용어입니다. 천체가 보여주는 변화를 말하지요. 낮과 밤의 길이의 변화와 태양 궤도의 변화 등에 사용합니다. 모든 빛은 변화되지만 빛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19-25절은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것과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합니다.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것은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2 대 1로 하라는 것입니다. 경청하여 듣는 연습은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들을 때는 대강 듣고, 다 듣기도 전에 속히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 시대인지 모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9),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잠 18:13). 성내기를 더디 하고, 말하기를 적게 하고, 듣는 것을 많이 하는 게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지 모릅니다.
또한 행함의 중요성을 말합니다(1:22-25). 말씀을 들었다면 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듣고 말하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에 해당된다면 듣고 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됩니다. 사람의 말은 경청하여 신중히 듣고 대답은 천천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경청하여 신중히 듣고 들은 바 말씀을 속히 행하여 순종하는 게 아름답습니다.
26,27절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에서 ‘경건’이란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정확히는 ‘참된 예배는 무엇이며, 참된 예배자란 누구인가?’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참된 예배란 예배복을 입고, 장엄한 음악과 정성 드려 행해지는 예배 의식이라기보다는 언어생활에 있어서 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자요 경건한 사람의 특징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2장 1-13절은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법’이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율법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라면 사랑을 포함하는 긍휼은 더 나아가 용서하고, 용납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며,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 하시며 긍휼을 행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합니다. 긍휼은 용납과 용서와 이해와 사랑을 포함하지요. 긍휼은 공의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 큰 원을 그려서 사랑으로 기회를 줍니다.
14-26절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와 완전히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야고보서의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합니다(2:22).
로마서는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는“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로마서는 ‘믿음’을,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두 권의 메시지를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이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만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 좋은 나무인 것을 증명하는 게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구원받은 사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지요. 따라서 로마서가 ‘복음의 씨앗’을 말한다면, 야고보서는 ‘복음의 열매’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종교나 윤리나 하나의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생명의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게 합니다.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는 것을 말하지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놀라운 예수의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행함을 통해서 구원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균형 잡힌 신앙이라면 ‘사상’과 ‘행동’이 일치하고, ‘기도’와 ‘노력’이 수반되고, ‘믿음’과 ‘행위’가 함께 걸어갑니다.
3장 1-12절은 우리의 혀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합니다. 큰 배가 조그만 방향키로 방향을 트는 것과 큰 산불이 조그만 불씨 하나로 일어나는 것을 비유로 말합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몸 전체가 더럽혀지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태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혀는 작으나 강한 영향력과 파괴력이 있습니다.
잠언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 12:18),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잠 18:21). 그러므로 혀는 주의하여 쓰고 말들의 입에 재갈을 먹이듯이 혀에 재갈을 먹이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 온 몸을 제어하게 됩니다.
13-18절은 위로부터 난 지혜를 말합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는 말씀은 우리를 자칫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8절). 그러나 이 구절은 길들일 수 없는 혀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지혜가 혀를 길들이게 하지요. “지혜로운 자의 혀는 사람을 치료하는 양약과 같다”라고 하듯 지혜가 혀를 길들이는 열쇠입니다.
두 종류의 지혜가 있는데 땅 위의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릇된 지혜와 참된 지혜의 차이입니다. 그릇된 지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이며, 악마적입니다. 예리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사람들을 분열시키며, 투쟁을 일으키고, 관계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지혜이고 그 근본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참된 지혜는 성결하고, 평화로우며, 관용적이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 이는 언제나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하여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게 합니다. 이처럼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있으면 관계에서 치유와 회복과 화합이 일어나지요. 그러한 사람의 혀는 치유와 생명을 줍니다.
4장 1-10절은 인생의 목표를 이 세상의 쾌락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행하는 데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은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할 때 응답을 받습니다. 세상에 대한 우정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하나님을 질투심이 많은 여인으로 표현하고, 성령이 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사모한다고 말합니다. 11,12절에 형제를 판단하며 비방하는 행위가 매우 중대한 죄라고 말합니다.
4장 13절-5장 6절에는 사람이 올바르게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면 죄라고 말씀합니다. 돈을 벌어 이기적으로 살며 일꾼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는 부자는 악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모은 부富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7장 11절에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쉬운성경에는 “남을 속여서 부자가 된 사람은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알을 품고 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중반에 이르면 그 재산을 잃어버릴 것이요, 늙으면 그의 어리석음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열심히 일하여 모은 부를 자기를 위해서는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지요.
5장 7-20절에 진정한 교회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찬송하고, 기도하고, 치유하고,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며,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교회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