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관통100일통독
말씀관통100일통독_신약

59. 빌레몬서 : 사랑으로 간구함

빌레몬서는 에베소서와 빌립보서와 골로새서와 함께 바울의 옥중서신 중 가장 짧습니다. 쓰인 연대와 옥중서신의 성격으로 볼 때 신약 성경에서 골로새서 다음에 배치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목회서신인 디도서 다음에 배치된 이유는 다른 옥중서신이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것과는 달리 빌레몬서는 목회서신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편지였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

빌레몬서는 용서와 사랑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는 말씀입니다. 도망간 노예 오네시모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심한 경제적인 해를 끼치고 로마로 도망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도망쳐 온 오네시모를 환영하고, 그를 양육하여 영적인 아들로 삼습니다. 바울에게 양육을 받으면서 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지요.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자기의 과거를 밝혔는지 아니면 바울을 방문한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알려서 밝혀졌는지는 모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오네시모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지요. 바울은 그를 자기 곁에 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 없이는 하지 않으려 했지요.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1:13).

그렇다면 먼저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돌려보냅니다. 당시 주인은 노예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졌지요. 노예가 도망을 가다가 붙잡히면 이마에 붉은 글씨로 ‘F’자를 인 쳤습니다. 이는 ‘Fugitivus’의 첫 글자로 ‘도망자’를 뜻합니다.

사랑의 간구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그의 주인 빌레몬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오네시모가 직접 전달하게 합니다. 빌레몬을 만나서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은 “내가 네게 사랑으로써 간구한다. 오네시모를 용서해주어라”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울은 자신이 리더라는 것을 앞세워 절대로 명령하거나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한다고 합니다.

또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빌레몬 네게 말한다” 하며 아주 겸손하게 요청합니다. 그리고 “만일 오네시모가 네게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라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기꺼이 돕는 놀라운 사랑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노예에서 형제로

또 그는 “오네시모를 이전 노예의 신분에서 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주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있는 여러 직업에서 고용주냐 고용인이냐, 사장이냐 사원이냐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랑을 주고받는 형제인 것을 말해줍니다.

또 오네시모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했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다”라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헬라어로 ‘유익하다’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오네시모가 이름 그대로 유익한 사람 오네시모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면 무익한 사람에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을 주는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실제로 노예 신분이던 오네시모는 후에 에베소교회의 존경받는 감독이 됩니다. 순교자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에 머물면서 에베소에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서두에서 에베소교회의 감독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가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남에게 재정적으로나 심적으로 많은 해를 끼쳤던 한 도망자 노예가 복음 안에서 변화되어 당시 교회에 가장 고명(高名)한 감독이 되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이 짧은 편지는 여러 면에서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해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용서하고, 형제로 대하면 과거의 삶에서 떠나서 변화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편지는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이 오네시모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빌레몬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게 큰 손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해야 할 입장에 있기도 합니다.

바울과 같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거절감과 쓴뿌리와 아픔과 두려움과 절망에 있는 사람을 사랑과 섬김으로 돌보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일꾼 되게 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나의 오네시모’를 끊임없이 용납하고, 용서하며, 소망을 불어넣어주며, 함께 서 있으며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

바울은 당시 노예제도가 얼마나 악한지 알았지만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노예제도를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자유롭게 해주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노예제도를 찬성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진정한 자유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당시는 때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 그가 노예 해방을 위해 사람들을 선동한다면 선한 것보다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갑자기 한순간에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효소가 밀가루에 들어가 부풀 때까지 기다리듯이 세상의 변화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함으로 사회의 전반적인 영역에 그리스도의 정신과 하나님나라의 정신이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현대판 라합이 교회에 출석했다면 바로 그의 복장과 말투와 삶을 청산하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먼저 복음을 알고 은혜를 맛봄으로 점차적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소망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빵을 만들 때 밀가루에 누룩을 넣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독교 정신으로 살아감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라합이 변화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마치 도망자 노예였던 무익한 오네시모가 존경받는 교회의 감독, 유익한 오네시모가 되었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