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

하나님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지식과 가장 고결한 사색과 가장 강력한 철학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인격과 이름과 본성에 관한 연구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속성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이 부족하고 불충분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불가해한 존재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무한히 위대하신 그분의 존재에 대해 한없는 경이감을 느끼며 소발처럼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하심, 편재하심, 전능하심을 생각하노라면 우리의 마음은 경이감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분이 성경에 스스로를 은혜롭게 계시하신 내용을 열심히 기도하면서 탐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완벽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자 아무 소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신성(神性)의 본질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경건한 마음으로 꾸준히 탐구하는 것만큼 지성을 넓히고 영혼을 고양하는 활동은 없다. 영혼을 고양하는 데 가장 좋은 탐구의 대상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다.”

지극히 옳은 말이다.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그의 말을 좀 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자가 탐구해야 하는 가장 적절한 주제는 하나님의 신성이다. 하나님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지식과 가장 고결한 사색과 가장 강력한 철학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인격과 이름과 본성에 관한 연구이다.

하나님의 신성을 묵상하면 사고의 지평이 크게 확장된다. 이 주제는 너무나도 넓어 우리의 생각이 그 광대함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고, 너무나도 깊어 우리의 교만이 그 무한함에 흡수되어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우리가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주제들은 자기만족을 부추겨 ‘보라, 나는 지혜롭다’라고 자만하게 만들기 쉽다. 하지만 이 주제는 너무나도 신비로워 우리의 다림줄로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고,

우리의 형안(炯眼)으로는 그 높이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나아진 것이 없어. 나는 아무것도 몰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말라기서 3장 6절을 본문으로 한 스펄전의 설교).

그렇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본성은 우리에게 겸손과 신중함과 숭앙심을 가르친다. 연구와 묵상을 마칠 때마다 우리 입에서는 욥처럼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14)라는 고백이 절로 튀어나오지 않을 수 없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달라고 간구하자, 하나님은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출 33:19)라고 말씀하셨다. 청교도 존 하우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속성들을 어렴풋이 드러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우리의 개념은 단지 거대한 책을 짧게 요약한 개요에 해당하거나 광대한 나라의 지극히 작은 일부를 잠시 엿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본성의 일부를 보여주셨을 뿐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지를 깨우침과 동시에 오류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속성을 드러내시어 우리로 그분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깊이 묵상할 수 있고, 또 비록 개개의 속성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여전히 미천하고 부족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으로 어느 정도 그분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속성을 드러내신다. 이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다소나마 깨달아 알 수 있다.”

천국에서 알게 될 지식

성도들이 현세에서 깨닫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장차 그들이 천국에서 알게 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서로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자(前者)를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고, 후자(後者)를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다.

물론 성경은 천국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고전 13:12). 하지만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만큼 우리도 그분을 온전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단지 현세의 지식과 비교하여 그렇게 표현되었을 뿐인 것을 오해해,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는 피조물의 불완전함을 간과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곤란하다.

영화롭게 된 성도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신자는 영화롭게 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천국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理性)과 믿음으로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분명하게, 또 지금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섭리와 사역을 통해 드러난 것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단번에, 그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 있을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을 이해하려면 그들 자신이 무한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심지어 천국에서도 그들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식은 나름대로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에 적절하며, 대상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름대로 적절한 인식 능력을 갖출 수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의 지식도 조금씩 발전한다고 믿는다. 천국에서 우리의 지식이 커질수록 우리의 축복도 증가한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계점에 도달하는 일은 없다. 아무리 무궁한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은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으시게 될 것이다”(존 딕).

참된 행복의 원천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묵상하면 그분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 충족적인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다른 존재로부터 무엇을 받지도 않으시고 다른 존재의 능력에 의해 제한받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모든 완전한 속성을 빠짐없이 갖추고 계신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홀로 존재하셨을 때 그분은 스스로 자신에게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의 이해, 그분의 사랑, 그분의 능력은 모두 그분 안에서 적합한 대상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외부의 존재를 필요로 하셨다면 그분은 독립적일 수 없고 더 이상 하나님이 될 수 없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골 1:16)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사와 인간에게 생명과 행복을 허락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물론 하나님은 지성(知性)을 갖춘 인간의 충성과 섬김을 요구하신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않으신다. 모든 유익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간다. 욥기 22장 2,3절을 보라.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여러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그 이유는 능력이 부족하시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종종 연약하고 무기력한 도구를 통해 그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영원히 추구해야 마땅한 최상의 존재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 충족적인 본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분의 은총이 곧 생명이며, 그분의 사랑과 친절이 생명보다 더 낫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애 3:24)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영광을 이해하는 것이 성도의 가장 큰 소원이자 가장 큰 만족을 가져다주는 원천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善)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6,7).

올바른 마음을 지닌 신자라면 누구나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을 묵상하면 그분이 우주의 최고 주권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존 딕은 이렇게 적절하게 말했다.

“피조세계에 확립된 주권 가운데 절대성을 지닌 주권은 없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을 수도 있으셨지만 그 기쁘신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 무한한 권능으로 만물의 일부를 생명이 없는 존재로 지으셨다.

그 가운데는 구조가 좀 더 거친 것도 있고 좀 더 섬세한 것도 있으며, 또 다양한 특성에 따라 제각기 구별되지만 생명과 의식이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의 일부를 성장과 확대 능력만을 지녔을 뿐 고차원의 생명은 없는 유기체와 성장과 확대 능력뿐 아니라 의식과 감각기관과 자발적인 운동력을 지닌 생명체로 채우셨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이성(理性)과 불멸의 영혼이라는 선물을 더하셨다.

그 덕분에 인간은 좀 더 우월한 차원에 속한 존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의 홀(笏)로 다스리신다.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말했다.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4,35).”

피조물은 아무 권한이 없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대하시든 인간은 불평을 늘어놓을 권리가 없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묵상하면 그분의 도덕적인 완전함을 항상 의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롭고 선하시며 오직 옳은 일만 행하신다.

하나님은 그 기쁘시고 의로우신 뜻에 따라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분은 스스로 보시기에 좋은 대로 개개의 피조물에게 적절한 지위를 허락하시고, 영원한 작정에 따라 여러 다양한 상황을 섭리하시고, 독자적인 결정에 따라 필요한 데 쓰실 그릇을 만드시며,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신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생명을 비롯한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이시고, 반항적인 죄인들에게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