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15장 악을 미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

안타깝게도 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를 적당히 얼버무리면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거나 그러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성품을 해치는 오점이라는 주장을 공공연히 늘어놓기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말을 들을 때면 속으로 은근히 반감을 품는다. 심지어 판단력이 남다른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이 너무 가혹해 묵상의 주제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선하심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예 고려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렇다. 하나님의 진노를 마치 그분의 성품을 해치거나 그분의 통치를 더럽히는 오점으로 간주해 멀리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할까?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를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복수심과 분노를 느낀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절대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다음 성경 말씀을 읽어보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하는 신(神)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신 32:39-41).

성구 사전을 뒤적여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언급하는 성경 구절보다 그분의 분노와 진노와 복수를 언급하는 성경 구절이 더 많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미워하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분노하신다(시 7:11 참조).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한 속성이다

하나님의 진노도 그분의 신실하심, 권능, 자비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고 티끌만큼의 결함도 없으려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성품은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죄에 대한 무관심은 도덕적인 오점이다.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인 문둥병자와 다름없다. 어떻게 완전함의 총화(總和)이신 하나님께서 악과 선, 어리석음과 지혜를 똑같이 취급하실 수 있겠는가?

어떻게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엄히 다스리지 않고 경시하실 수 있으며, 순결하고 사랑스러운 것만을 기뻐하시는 분께서 불결하고 악한 것을 혐오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지옥이 천국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다른 것보다 덜 완전한 것이나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의한 것은 무엇이나 영원히 증오하신다. 그분은 악을 미워하시고 분노하시며 공정하게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죄를 징벌하시는 이유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신다. 이 모든 사역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진노라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분노하시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거역하고, 그분의 신성불가침한 주권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는 그분이 주권자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경멸하는 분이 얼마나 엄위로운 존재이신가를 알아야 하고, 자신이 무시하는 진노가 얼마나 두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상처를 받은 대로 되갚아주겠다거나 순전히 상대방을 해칠 목적으로 가하는 악의에 찬 보복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복수를 위한 복수는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단지 우주의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옹호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말한 내용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와 같은 성경 구절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형 선고가 내려지고 땅이 저주를 받고 인류의 첫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처음 나타났고, 그 후에는 홍수 심판과 하늘에서 쏟아졌던 불에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물론 온 세상을 지배하는 죽음의 현실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는 불법에 대한 율법의 단죄와 희생제사 제도의 설립을 통해 선포되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신자들에게 온 세상이 헛된 것을 좇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수고하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영광은 물론, 그분이 죄의 철천지원수이자 죄인에게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울러 증언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어 신성(神性)을 드러내셨을 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하나님이 그전에 죄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신 것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드러난 진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악인들이 장차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이전보다 더욱 엄숙하고 확실하게 선포되었다. 신약시대가 시작된 이후 하늘로부터 두 가지 계시가 주어졌다. 하나는 진노의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의 계시이다”(로버트 홀데인).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완전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시 95:11)이라는 말씀이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맹세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은혜의 약속이고(창 22:16), 다른 하나는 심판의 경고이다(신 1:34).

하나님은 선택받은 백성에게는 자비로 맹세하시고, 악인들에게는 심판으로 맹세하신다. 맹세는 엄숙한 서약이다(히 6:16 참조).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절에서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시편 89편 35절에서는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맹세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셨고, 시편 95편 11절에서는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와 거룩한 속성을 똑같이 취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함은 물론 진노로 맹세하신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요 1:18). 이것이 성경이 “어린양의 진노”(계 6:16)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라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가 종종 묵상해야 할 그분의 완전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혐오하신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죄를 변명하고, 그 끔찍함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과 그 두려운 형벌을 깊이 연구하고 생각할수록 죄의 끔찍함을 더욱 절실히 의식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생겨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권위를 존중하는 마음과 그분의 의로운 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수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는 사실을 자주 묵상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면 “장래 노하심”(살전 1:10)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열심히 찬양할 수 있는 마음도 생겨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기를 좋아하느냐 꺼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사모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질과 그분 안에 영원히 거하는 완전한 속성들을 묵상하며 그분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악한 성향을 따라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빚어내지 않도록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셨다.

우리가 “그 거룩한 기념에 감사하지”(시 97:12) 않고, 곧 다가올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그 진노를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 즉 그분을 거역했던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며 영원한 형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는 길

모세는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 32:43)라고 노래했다. 요한 역시 하늘로부터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계 19:1,2)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권위를 옹호하시고, 엄위로운 통치를 베푸시고, 정의를 나타내시고, 그분을 대적했던 교만한 반역자들을 모조리 처단하시는 날이 이르면 성도들은 크게 기뻐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각자에게 적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할”(시 1:5)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불법을 감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크게 슬퍼하지 않으실 수 없었다. 그분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막 14:33). 그분은 심한 고뇌를 앓으며 핏방울과 같은 땀을 흘리셨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히 5:7),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거듭 기도하셨으며, 마지막에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다.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죄악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면서 그렇게 두려워했다면 비천한 죄인들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고 울부짖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유일무이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도망치지 않는다면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할 것인가”(렘 12:5).

“인류의 대다수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면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대하심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주가 적군을 한곳으로 몰아넣었다면, 그는 그들의 보급로를 모조리 차단하고 그곳을 포위해 그들을 굶겨 죽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은 눈짓만으로도 모든 원수를 멸하실 수 있는데도 무한히 인내하시며 그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날마다 공급하신다.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친히 선(善)을 베푸실 뿐 아니라 우리한테까지 우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라고 명령하신다.

하지만 죄인들이여, 하나님의 심판을 영원히 모면할 줄로 착각하지 말라.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작은 죄 하나까지 남김없이 갈아 부순다. 지금 하나님의 인내와 관대하심이 더 많고 클수록 장차 그분의 선하심을 남용한 죄인은 더욱 끔찍하고 가차 없는 분노의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바다보다 더 부드러운 것은 없지만 바다가 성을 내 폭풍우로 변하면 그 분노를 당할 자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선하심은 말할 수 없이 은혜롭지만,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신 다음에는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윌리엄 거어널, 1660).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도망쳐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임박한 진노를 피해야”(마 3:7) 한다. 간절히 권하건대 이런 말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께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방심하지 말라. 과연 확실한지 다시 확인하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어 우리의 참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설교자들을 위한 당부

설교할 때 이 엄숙한 진리,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빼놓지 않고 전하는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청중에게 그들의 악한 삶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진노하시게 만든다는 사실과 그들이 심판의 날을 앞두고 차곡차곡 진노의 숯불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상황은 그때와 비교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라는 말씀을 상기시켜 부주의한 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속된 삶을 일삼는 신자들에게 마음의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듣기가 몹시 어렵다.

그리스도의 길잡이였던 세례 요한은 청중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라고 경고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도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고후 5:11)라고 말했다. 충성된 증인이 되려면 천국은 물론 지옥에 관해서도 분명히 증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