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13장 자격 없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하나님의 은혜를 전체 인류나 동식물에게 적용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자비와 구별된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지으신 모든 것”(시 145:9)을 대상으로 한다. 반면에 은혜는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선의와 사랑과 구원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아브라함 부스는 《은혜의 통치》라는 유익한 책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정의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영적(靈的)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은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공로도 없고 보답도 요구할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축복을 통해 나타나는 주권적인 구원 은총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스스로 공로를 세우기는커녕 지옥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뜻한다. 공로를 세우지도 않았고, 구하지도 않았고 관심을 기울인 적도 없는데 값없이 주어지는 은총,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는 돈을 주고 사거나 노력해서 받거나 이겨서 얻을 수 없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수혜자가 그것에 대해 아무 주장도 할 수 없고,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출 수도 없는 것이다. 은혜는 순수한 선물이며, 처음에는 바라거나 구한 적이 없는 상태에서 거저 주어진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가장 잘 설명한 내용이 바울 서신에서 발견된다. 바울 서신에 따르면 ‘은혜’는 행위나 자격과는 그 종류나 정도에 상관없이 완전히 무관하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라는 말씀이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은혜와 행위의 관계는 산성 물질과 알칼리성 물질의 관계와 같다. 바울 사도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양립할 수 없다. 이는 기름과 물이 서로 섞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로마서 4장 4,5절을 참조하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義)로 여기시나니.”

은혜의 특징

하나님의 은혜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은혜는 영원하다. 하나님은 구원 은혜를 나타내시기 전에 미리 계획하셨고, 그것을 베푸시기 전에 미리 의도하셨다. 다음 성경 말씀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둘째, 은혜는 값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라는 말씀대로 은혜는 돈으로 살 수 없다.

셋째, 은혜는 주권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은혜를 자유롭게 베푸신다.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義)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롬 5:21)라고 말했다. 은혜가 왕 노릇 하려면 보좌에 군림해야 한다. 보좌의 점유자가 곧 주권자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은혜의 보좌”(히 4:16)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은혜는 공로 없이 주어지는 은총이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라고 선포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류가 죄를 지어 타락하도록 놔두시더니 이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모두를 하늘나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구나. 물론 그래야 공평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은 반역을 도모한 인간들
은 물론이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아무런 의무가 없으시다.

영생은 선물이다. 따라서 선행으로 획득하거나 권리로서 주장할 수 없다. 구원이 선물일진대 그 누가 감히 하나님께 아무개를 구원하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그분이 정하신 규례에 따라 전심으로 구원을 간구하는 이들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빈손 들고 그분이 정하신 방법대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을 내쫓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에서 제한된 명수의 사람들만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고 하더라도 그분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억지로 은혜를 베푸셔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자기 길을 고집하는 이들까지 구원해야 할 책임이 있으실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값없이 영원한 구원이 주어진다는 진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몹시 불쾌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게 만든다. 회개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의 의견을 묻지 않고 영원 전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에서 극도의 굴욕감을 느낀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인간으로서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자신을 비울 능력이 없다. 교만한 반역자들은 구원 은혜가 은총을 입은 대상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진리에 거세게 항변한다. 이는 진흙이 토기장이를 향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다. 무법한 반역자들은 감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공의를 의문시한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그분께서 주권적으로 선별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선택적”이라는 표현은 일부는 따로 구별해 선택하고, 일부는 간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상을 숭배하던 이웃 종족들과 구별해 “자신의 친구”로 만드신 것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냥 두고”(마 15:14) “세리와 죄인들”은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도 모두 선택적 은혜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자격이나 자질을 조금도 갖추지 못한 이들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임스 허비(1751년)는 이러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했다.

“하늘의 법정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선언한다. 므낫세는 가히 악의 화신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무죄한 피로 온통 물들였다. 또한 그는 죄를 저지르는 데 능통했다.

다시 말해 므낫세는 스스로 극악무도한 불경죄를 수도 없이 저질렀을 뿐 아니라 도덕 기준을 왜곡하고 백성들을 타락의 길로 유도해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이 저지르는 가증스러운 범죄보다 훨씬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역대하 33장을 읽어보라. 하지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는 그를 겸손하게 만들고 죄를 뉘우치게 해 죄 사함을 받아 영원한 영광의 후사가 되게 인도했다.

적의에 불타고 피에 굶주렸던 박해자 사울을 보라. 그는 짙은 살의를 품고 교회를 협박하는 한편 예수님의 제자들을 살해하는 일에 적극 동조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양 떼와 같은 신자들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많은 해를 끼쳤고 이미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했지만 여전히 복수심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것들은 단지 맛보기에 불과했다. 그는 피에 굶주린 욕구를 진정하기는커녕 신자들을 발본색원해 교회를 철저히 궤멸시키려고 노력했다. 피를 원하는 그의 갈증은 도무지 만족을 몰랐다. 그는 더욱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 박해에 박차를 가했다(행 9:1).

사울의 말[言]은 창과 화살이었고, 그의 혀는 날카로운 칼이었다. 신자들을 위협하는 일이 그에게는 호흡만큼 자연스러웠다. 적의에 불타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매시간 많은 신자가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그가 들이키는 호흡 한 숨이 신자들을 실제로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했고 또 무죄한 제자들 가운데 일부를 쓰러뜨리지 못했던 이유는 단지 그에게 그들을 죽일 수 있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판단에 따르더라도 사울이 반드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 저주스러운 세상에 더 무거운 쇠사슬과 더 깊은 지하 뇌옥이 존재한다면 바로 참 경건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그를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소리 높여 찬양하라. 그런 사울이 선지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었고, 거룩한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으며, 영광스러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변모했다.

고린도 사람들도 보라. 그들은 악명이 자자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조차 혐오스러워할 만큼 노골적으로 불법을 저지르며 가증스러운 죄를 밥 먹듯이 일삼았다. 하지만 난폭하고 음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던 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9-11).

그들은 구세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고, 복되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 거룩하게 되었으며,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통해 의롭게 되었다. 그 덕분에 전에는 세상의 골칫거리였던 이들이 이제는 하늘의 기쁨, 곧 천사들의 기쁨이 되었다.”

복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이는 성자(聖子)께서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무 은혜도 베풀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창 6:8 ; 출 33:19 참조).

하지만 은혜와 진리는 구세주가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을 때 가장 온전하고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받은 백성에게 전달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은혜와 의(義)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15,17,21).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을 통해 선포된다(행 20:24). 복음은 의로움을 자처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인간의 철학을 중시하는 교만한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교만을 충족시키는 요소가 복음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에 따르면 구원은 오직 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 곧 그리스도가 없으면 인간은 구원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복음은 인간을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규정한다. 가장 훌륭한 도덕군자나 가장 방탕한 난봉꾼이나 헤어 나올 수 없는 곤경에 빠진 상태이기는 마찬가지다. 신앙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경건한 교인도 가장 불경스러운 이교도에 비해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

복음은 아담의 후손을 모두 타락으로 인해 오염된 존재, 곧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불행한 존재로 간주한다. 오직 복음이 전하는 은혜만이 인간의 유일한 희망이다. 모든 사람이 거룩한 율법을 어긴 범법자, 곧 단죄받은 죄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물론 판결을 기다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에 대한 판결은 이미 집행된 상태이다(요 3:18 ; 롬 3:19). 은혜가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죄인이 엄격한 정의를 요구한다면 그의 영원한 몫은 불못뿐이다.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에게 선고된 하나님의 심판을 순순히 받아들여 그 의로운 판결을 인정하고, 빈손을 내밀어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드러내신 구원 은혜를 갈구하는 것뿐이다.

성삼위(聖三位) 가운데 제3위가 되시는 성령께서는 은혜의 전달자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은혜의 영”(슥 12:10, 흠정역 참조)으로 불리신다. 성부 하나님은 은혜의 원천이시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원의 언약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성자 하나님은 은혜의 유일한 통로이시고, 복음은 은혜의 공표자이며, 성령 하나님은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성령께서는 복음의 구원 능력을 영혼들에게 적용하신다. 즉, 그분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시고, 그들의 강퍅한 의지를 정복하시고,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녹이시고, 그들의 닫힌 눈을 열어주시며, 그들의 더러운 죄를 씻어주신다. 작고한 비숍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 스스로에게 드리워진 공의(公義)의 칼날을 제거할 수 없고, 부패할 대로 부패해 스스로 자신의 본성을 치유할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너무 심해 스스로 그분께로 돌이킬 수 없으며, 영혼의 눈이 멀 대로 멀어 그분을 볼 수 없고, 영혼의 귀가 멀 대로 멀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며, 생명을 잃은 상태인지라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들을 무덤에서 나오게 해 새 생명을 주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