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12장 돌아오기를 바라고 인내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인내를 다룬 글은 그분의 다른 속성들을 다룬 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님의 속성을 길고 상세하게 논하면서도 그분의 인내는 단 한 줄도 다루지 않은 채 넘어가는 저술가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인내도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완전하고 탁월한 속성으로 우리의 존경과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데, 우리는 왜 그것을 그렇게 쉽게 간과하는 것인지 이유를 알기 어렵다.

물론 하나님의 인내라는 용어는 다른 속성들과는 달리 성구 사전에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의 경우는 다르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인내라는 영광스러운 속성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인내를 자주 묵상하며 우리의 마음과 삶을 그렇게 변화시켜 나가려고 힘쓰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많은 저술가들이 하나님의 인내를 따로 다루거나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속성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라는 두 가지 속성(그중에서도 특히 자비)과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인 듯하다. 하나님의 인내는 종종 그분의 은혜나 자비와 결부되어 언급된다(출 34:6 ; 민 14:18 ; 시 86:15 등).

하나님의 인내가 자비의 발현(즉,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속성이 동일한 하나이며 서로 나눌 수 없는 속성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비록 확실하게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둘을 동일시할 수 없는 여러 증거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인내란 무엇인가?

청교도 스테판 차녹은 하나님의 인내를 이렇게 정의(定義)했다.

“하나님의 인내는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속하지만 그 둘과는 엄연히 다르다. 지고선(至高善)이신 하나님은 지극히 온유하시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은 항상 선하심과 짝을 이룬다. 선하심이 클수록 온유하심도 더욱 커진다. 누가 그리스도만큼 거룩하고, 누가 그분만큼 온유한가? ‘여호와는 …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라는 말씀대로,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의 자비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이 주제를 형식을 갖춰 생각하면 자비와 인내는 서로 다르다. 즉, 자비는 비참한 인간과, 인내는 죄를 지은 인간과 각각 관련이 있다. 자비는 비참한 상태에 놓인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고, 인내는 비참한 상태를 야기하고 더욱 악화시키는 죄를 참아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그분의 자제력, 곧 죄인을 벌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분노를 억제하시는 힘으로 정의할 수 있다. 나훔 선지자는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권능이 크시며”(나 1:3)라고 말했다. 스테판 차녹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쉽게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피해를 용납하거나 가해자를 조금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 인내하는 법이 거의 없다. 인간이 감정의 도발을 억제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군주는 백성들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명실공히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이유는 자제력이 뛰어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만큼이나 스스로를 다스리시는 데 뛰어나시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인내는 그분의 자비와 명백히 구별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인내 덕분에 은혜를 입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오로지 피조물을 위한 것인 데 비해 하나님의 인내는 주로 그분 자신, 즉 하나님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행동을 다스리는 자제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내는 큰 피해를 당하셨어도 즉시 복수하지 않고 참으실 수 있는 자제력이다. 하나님의 인내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노하기를 더디 한다”로 번역된다(느 9:17 ;시 103:8). 하나님의 본성은 격한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지혜와 의지로 냉철함과 위엄을 유지하시어 그 높으신 권위에 알맞은 행동을 취하신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인내의 정의를 뒷받침하면 다음과 같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극악한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분노를 샀을 때 곧바로 하나님의 인내에 호소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그들에게 기업을 허락하지 않겠노라”라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전형적인 중보자의 태도를 취하며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 하셨나이다”(민 14:17,18)라고 호소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내는 그분의 자제력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들을 즉시 멸하셨다면 그분의 자제력이 그토록 탁월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을 인내하시며 오랫동안 형벌을 자제하심으로 인내의 속성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셨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라는 말씀대로 악인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곡해하지만, 거듭난 영혼은 그것을 귀히 여기며 우러러본다.

“인내의 하나님”(롬 15:5)은 하나님을 일컫는 호칭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을 인내의 하나님으로 부르는 첫 번째 이유는 그분이 피조물 안에서 인내의 주체이자 목적이시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인내가 그분의 본성이기 때문이며(인내는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라는 말씀대로 인내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혐오하거나 피해를 준 사람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심

하나님의 인내는 죄인들을 대하시는 그분의 태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홍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류에게 베푸신 인내는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당시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벌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경고하셨다.

그분은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벧전 3:20). 아마도 그분은 최소한 120년을 기다리셨을 것이다(창 6:3). 그 기간 동안 노아는 “의(義)를 전파했다”(벧후 2:5).

그뿐이 아니다. 나중에 이방인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피조물을 그분보다 더 섬기고, 양심에 어긋나는 가장 가증스러운 행위를 일삼으며 죄의 분량을 꼭대기까지 다 채웠을 때도 하나님은 즉시 심판의 칼을 빼들어 그들을 처단하지 않으시고,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시고” 그들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행 14:16,17) 행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저희 소행을 참으셨다”(행 13:18).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주변 민족의 악한 관습을 좇아 우상을 숭배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엄히 징계하셨지만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구원자를 보내셨다.

그들의 죄가 꼭대기까지 차올라 무한한 인내심을 지닌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고 참으시다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은 그분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건을 통해 정점에 달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40년을 더 기다리시다가 그들이 여전히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자”(행 13:46) 결국 로마 군대를 보내 그들을 징계하셨다.

하나님의 인내는 오늘날의 세상에 대해서도 여전하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오만한 태도로 죄를 짓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이 짓밟히고 하나님께서 공공연히 모욕을 당하신다.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진정 놀랍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불신자들과 주제넘은 신성모독자들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즉시 처단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왜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박해하는 이들을 다단과 아비람의 경우처럼 땅을 갈라지게 만들어 그 깊은 틈새로 집어 던지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으로 위장한 채 온갖 종류의 죄를 용납하고 저지르는 거짓 신자들은 왜 즉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일까? 어찌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가 그런 가증스러운 사람들을 단번에 끝장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자. 우리도 오랫동안 대중을 좇아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아(自我)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한 행위를 얼마나 오래 참아주고 계신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불타는 나무 동강과 같은 신세를 면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져 영원한 기업의 후사가 되었는데도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감사도 빈약하고, 복종도 마지못해 겨우 하고, 죄와 잘못을 거듭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원리, 곧 육신을 감내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벧후 3:9)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인내는 단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누구보다 선택하신 백성에게 더 큰 인내를 베풀고자 하신다.

하나님의 인내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마음과 양심이 부드러워지고, 거룩한 가르침을 통해 성도의 인내를 배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자.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신다. 그런데 어찌 한 번의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복수를 꿈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