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11장 영원무궁히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분의 완전한 본성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라는 말씀이 이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완전하다. 그분의 본성은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다. 그분의 본성을 더 완전하게 하기 위해 그 이상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그 자체로 아무 결함이 없는 순수한 선(善)이시다. 하지만 피조물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참여하거나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어야만 선하다. 하나님은 본질상 선하시다.

그분은 선하실 뿐 아니라 선 자체이시다. 피조물의 선은 부가된 자질이지만 하나님의 선은 그분의 본질에 속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시다. 피조물의 선이 한 방울의 물이라면 하나님의 선은 무한한 대양과 같으며, 선을 한자리에 모두 모아놓은 것과 같다. 하나님의 선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토마스 맨튼).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지고선(至高善)이시다.

앵글로색슨어에서, 지금 ‘하나님’을 뜻하는 ‘God’의 본래 의미는 ‘선’(good)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실 뿐 아니라 가장 선하시다.

피조물 안에 존재하는 선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은 파생된 자질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본성의 정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 그 전능하심을 나타내시기 이전부터 그 능력이 영원무궁하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선한 은혜를 베푸시고 피조물에게 선한 자질을 부여하시기 이전부터 그 선하심이 영원무궁하시다.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이 처음 나타났던 순간은 바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였다. 시편 기자는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시 119:68)라고 찬양했다. 하나님 안에는 만물을 충분히 흡족하게 할 수 있는 무한한 축복의 보고(寶庫)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

창조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창조, 작정, 율법, 섭리 등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선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창조를 통해 가장 먼저 드러났다. 창조를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인 인간을 생각해보자. 참으로 시편 기자처럼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의 구조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주어진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손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또한 지친 몸의 피로를 풀라고 잠을 허락하셨으니 그 얼마나 선하시며, 눈동자를 보호하라고 눈꺼풀을 달아주셨으니 그 얼마나 은혜로우신가! 이런 사례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에게 국한되지 않고 모든 피조물을 향해 나아간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 145:15,16).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 말하자면 아무리 많은 책을 써도 끝이 없다. 공중의 새들이든 숲 속의 짐승들이든 바다의 물고기들이든 모두가 부족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주어졌다. 이런 이유로 시편 기자는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5)라고 찬양했다. 진실로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피조물의 기쁨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
피조물에게 허락하신 다양한 기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미각의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우리의 주린 배만을 채워줄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고기와 채소와 과일의 맛을 제각기 따로 음미할 수 있는 미각을 허락하셨으니 그 얼마나 선하신가! 하나님은 여러 감각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만족케 하신다. 이 또한 그분의 선하심을 드러낸다.

이 밖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다채롭게 하지 않으시고 단지 필요한 양식만을 생산하는 곳으로 만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아름다운 꽃들을 허락하시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시고 그 향기로운 냄새를 맡게 하셨다.

또한 들판을 거닐 때도 새들의 아름다운 지저귐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셨다. 자연 만물이 이런 아름다움과 매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게 된 것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진실로 하나님은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통치 방법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즉시 “섞이지 않은 진노”(계 14:10 참조)를 쏟아내지 않으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축복과 위로와 즐거움을 모두 박탈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 대신 자비와 심판이 공존하는 새로운 통치 방법을 선택하셨다.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 방법을 철저히 연구할수록 “긍휼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약 2:13)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타락이 불러온 모든 재난과 악에도 불구하고 인생에는 악보다 선이 더 많다. 예를 들어 예외가 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한다면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날보다 건강하게 지내는 날이 훨씬 더 많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불행보다 행복이 훨씬 더 많다. 심지어 큰 불행을 겪을 때도 그로 인한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상황에 적응할 수 있고, 상황을 선용할 수 있는 유연한 마음을 허락하셨다.

세상에 고난과 슬픔이 존재한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문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한 채 죄를 짓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다면”(롬 2:4,5), 자기 자신 외에 누구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받은 복(福)을 오용하고 은혜를 남용하며 자비를 짓밟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처벌하신다고 해서 그분을 선하시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그분의 권위에 항거하고 그분의 사자(使者)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아들을 멸시하며 선택하신 백성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빛나게 한다.

구원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시어 …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신”(갈 4:4,5) 구원 사역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늘의 천군과 천사는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복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딛 2:11).

하나님께서 죄지은 인간 모두에게 구원을 베풀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으셨다. 설혹 하나님이 아무도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고 해도 그분의 선하심은 훼손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사실을 문제 삼는 이들에게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한을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선하심에 감사로 보답하자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8)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선한 은혜를 경험하는 이들은 마땅히 감사로 보답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이 늘 일정하고 풍성하게 주어지는 관계로 우리는 그분의 은혜에 충분히 감사하지 않을 때가 많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다 보니 그분의 선하심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고, 매일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다 보니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느뇨”(롬 2:4)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한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를 맛보고도 회개하기는커녕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간과하신다고 믿고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신자의 믿음을 지탱하는 지지대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신자의 마음에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닌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악을 행해도 그런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도 더욱더 하나님을 공경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다른 것은 의심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양하지만 그분의 본성은 언제나 동일하다”(찰스 스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