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10장 선택하신 백성에게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지 못한 태도는 오늘날과 같은 사악한 시대에 가장 흔한 죄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의 말은 극도로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계약서와 같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한 부부들 사이에서도 불륜을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신성한 결혼 서약을 저버리는 일이 마치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 쉽게 이루어진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전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한 사람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진리를 공격하고 부인하는 경우가 셀 수 없이 많다. 독자들이나 저자인 나도 이 두려운 죄로부터 안심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측면에서 그리스도께 불충실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빛과 특권을 무시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따라서 이 참담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항상 모든 일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자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신실함은 하나님의 존재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 속성이 없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시다면 그분의 본성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신다는 것인데,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主)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신실함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시 89:8)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신실함으로 옷을 입으셨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을 가리켜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5)라고 표현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5)라고 노래했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은 인간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것은 무엇이나 지극히 위대하고 광대하고 불가해하다. 하나님은 잊으시거나 실패하시거나 머뭇거리시거나 헛된 말을 일삼는 법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말씀이나 예언을 충실히 지키시며, 일단 약속을 하시거나 심판을 선언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人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따라서 신자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라고 소리 높여 찬양해야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성경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구절이 많다. 하나님은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신 뒤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라고 말씀하셨다. 매년 새로 시작되는 한 해는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의 신실함을 증언한다.

또한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13-16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흘렀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의 벽돌 굽는 가마 사이에서 고통 중에 신음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옛 약속을 잊으셨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다음 성경 구절을 읽어보자.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 12:41).

또한 이사야는 오래전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라고 예언했다. 그로부터 다시 수세기가 흐른 뒤에 바울 사도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그분의 약속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과의 관계에서 충실하시다. 그분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누구든지 실망하지 않는다. 성경은 도처에서 이 귀한 진리를 명백히 증언한다. 그 이유는 선택하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분의 완전한 속성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이다. 이 속성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분의 속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사실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서로 별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고 귀한 약속’을 많이 주셨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그 약속들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약속하신 말씀을 모두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을까? 과연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히 10:23)라는 말씀을 마음속으로 굳게 확신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

누구의 삶에나 쉽지 않은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신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살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큰 시련에 직면하고, 눈물이 우리의 눈을 흐릿하게 적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때가 찾아온다.

그런 때면 세상의 온갖 소음이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탄의 속삭임이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세미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소중히 여기던 계획도 좌절되고, 의지했던 친구들도 우리를 실망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신자들도 우리에게 등을 돌린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께 충실하려고 노력했건만 어두운 구름이 몰려와 그분을 가린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고난의 섭리와 은혜로운 약속을 조화시키기가 어려운 정도를 뛰어넘어 아예 불가능하다. 비틀거리는 영혼이여, 노곤한 순례자여,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라는 말씀에서 은혜를 구하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와 그분의 사랑의 약속을 조화시키기 어려울지라도 잠잠히 기다리며 인도의 빛을 구하라. 그러면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라는 말씀대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시어 새로운 깨달음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거나 속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 30:18).

연약한 이성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신뢰하라.
주님은 찌푸린 표정의 섭리 뒤에
미소 띤 얼굴을 감추고 계신다.
너희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새로운 용기를 내라.
그대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구름은
자비를 가득 머금고 머지않아
그대의 머리 위에 축복을 쏟아내리라.
- 영국 시인 윌리엄 코퍼의 시

구원과 징계를 성실히 베푸시는 하나님

“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시 119:138).

하나님은 최상의 것만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최악의 것도 배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타락으로 인한 참상을 솔직하게 보여주시며, 죄가 몰고 온 끔찍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분은 언제나 악을 극도로 미워하시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시고 악을 성실히 징벌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멸하는 불”(히 12:29)이라고 경고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은혜로운 약속에 충실하실 뿐 아니라 심판의 경고에 대해서도 똑같이 충실하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엄숙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와 고라와 아간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죄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지 않으면 영원한 불못의 형벌이 우리의 운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1.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보존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바울 사도는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라고 말했다. 그 바로 앞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선택받은 백성을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약속이 발견된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

‘성도의 견인(堅忍)’(성도는 끝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교리)에 대한 바울 사도의 확신은 믿음을 지키겠다는 신자들의 결심이나 능력이 아니라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성자(聖子)에게 선택하신 백성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을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어 영광 가운데서 영생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2.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징계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물론, 은혜를 거두시는 일에도 똑같이 신실하시다. 그분은 기쁨을 주기도 하시고 슬픔을 주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편안할 때나 엄한 징계 아래 고통을 받을 때나 늘 변함이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단지 말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징계의 회초리로 우리를 때리실 때도 변함없이 신실하시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는 고백과 더불어 불평보다는 도리어 감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신다. “주의 몸(성만찬)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고전 11:29,30)라는 말씀이 이러한 원리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주님께 매를 맞을 때는 다니엘처럼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단 9:7 참조).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시 119:75)라고 말했다. 고난과 시련은 영원한 언약에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사랑이 겉으로 표현된 것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중에도 신실하실 뿐 아니라 고난으로 징계를 베푸시는 데도 신실하시다. 다음 성경 말씀을 읽어보자.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시 89:32,33).

징계는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양립하는 것은 물론, 그것의 표현이자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적 사랑’(히브리어로는 ‘헤세드’, 언약에 기초한 신실한 사랑) 때문에 필요할 때 징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호 5:15)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난은 성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3.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신실하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여기에서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는”(살전 5:23)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위대한 이름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롬 8:30) 목적에도 충실하시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백성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기이한 빛으로 인도하시고, 그 후로 끝까지 그들의 구원을 충실히 보전하심으로써 그들을 향한 영원한 사랑을 드러내신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딤후 2:19)라고 말했다. 우리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확신했던 바울 사도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해할 때

이 복된 진리,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해하면 걱정근심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다. 걱정근심이 가득한 마음,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앞날에 대한 짙은 불안감 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징후이다.

선택하신 백성을 처음부터 줄곧 보살펴오신 하나님은 말년에도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과거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우리 모두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9)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자.

또한 이 복된 진리를 이해하면 불평을 그칠 수 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잘 알고 계신다. 이 진리를 붙잡으면 무례한 불평을 그칠 수 있다. 징계와 시련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그분의 지혜와 정의를 인정하며, 그분의 꾸짖음을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리고 이 복된 진리를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강해진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善)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9)라고 말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굳게 의지하면, 머지않아 그분의 섭리에 만족하며 “하나님이 만사를 선히 행하신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