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4장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

과거에 이 주제는 참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성경의 교리 가운데 신학 논쟁이나 교회의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던 교리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의 죽음, 그리스도의 재림, 신자의 칭의, 성화(聖化), 성도의 견인(堅忍), 교회, 교회 정치, 직임, 권징, 세례, 성만찬 외에도 많은 보배로운 교리들이 논쟁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런 교리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많은 논쟁도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의 증언을 가로막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豫知)도 논쟁을 피할 수 없는 교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굳이 침묵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논쟁하게 내버려두고,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계시의 빛에 따라 진술해야 할 바를 진술하면 그만이다.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 많은 사람이 모르는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예지라는 용어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지의 범위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무지가 너무나도 큰 탓에 설교자들과 성경 교사들이 일반인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 백성을 상대로 이 주제를 잘못 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잘못을 방지하고 믿음으로 진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면서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온유한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다.

오늘날 죄인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불신하고 부인하기 위해 예지 교리를 오용하는 이들이 있다. 고등비평가들은 성경 영감설을 부인하고,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논박하며, 거짓 성경 교사들은 영생을 주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부인할 목적으로 예지 교리를 왜곡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지라는 이 복되고 엄숙한 진리를 전하고,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영원히 선택하시어 그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셨다는 교리를 제시할 때마다 마귀는 자신의 하수인들을 통해 선택이 하나님의 예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게 한다.

그들이 말하는 예지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덜 강퍅하다는 사실, 곧 성령의 역사에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사실을 아시고 선택을 결정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믿음을 받아들일 사람들을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예지예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전적 타락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주장은 하나님의 작정이 피조물에게서 발견되는 것에 좌우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독립성을 훼손한다.

하나님께서 일부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에 따라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은 사실을 거꾸로 뒤집는 것, 곧 진리를 전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시어 구원의 은혜와 믿음의 선물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그분의 주권적 결정에 따른 것이라고 증언한다.

거짓 신학은 우리가 믿을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선택과 구원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이 원인이고 우리의 믿음이 그 결과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지의 의미

흔히 오해되는 이 귀한 진리에 관한 논의를 계속 진행하기에 앞서 잠시 용어의 의미를 정의(定義)해보기로 하자. “예지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미리 아는 것”이라고 얼른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쉽게 속단하거나 국어사전을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이 용어의 어원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용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용어든지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그 의미와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간단한 규칙을 무시하는 탓에 많은 혼란과 잘못이 초래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사용된 용어들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속단할 뿐, 성구 사전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검증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육신’이라는 용어를 예(例)로 들어보자. 육신의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해 성경에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의미를 검토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육신이 인간의 육체와 동일한 의미라고 성급히 결론짓고 더 이상 그 의미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육신’은 단순히 뼈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 이 용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성경의 용례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그것이 사용된 여러 문맥을 각기 따로 검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세상’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자. 성경을 읽는 일반 독자들은 이 용어를 인류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그런 탓에 이 용어가 사용된 성경 구절들이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썩지 않을 것’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다. 이 용어의 의미는 더 이상 연구가 필요하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영혼의 불멸성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나 함부로 그 의미를 추정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썩는’과 ‘썩지 않는’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들 용어가 영혼이 아니라 항상 육체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육신’, ‘세상’, ‘썩지 않을 것’에 관해 말한 내용을 ‘안다’와 ‘미리 안다’에 적용해보자. 이 용어들이 단순한 인지(認知)나 인식을 의미한다는 섣부른 주장을 피하고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지’라는 용어는 구약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다’라는 용어는 자주 등장한다. 이 용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종종 그분의 은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는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애정을 뜻한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읽어보자.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신 9:24).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

“저희가 방백(지도자 또는 관리)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알지 못하는) 바며”(호 8:4).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

이 성경 구절들에서 ‘안다’라는 말은 ‘사랑하다’ 또는 ‘지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안다’는 종종 구약성경에서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읽어보자.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마 7:23).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 8:3).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지’라는 용어는 ‘안다’라는 용어에 비해 그 의미가 좀 더 분명하다.

예지가 등장하는 성경 구절을 모두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말이 단순히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미리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사실, ‘예지’는 성경에서 사건이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 말은 항상 사람과 관련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들을 “미리 아신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성경 구절 몇 개를 간단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사도행전 2장 23절을 살펴보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이 구절의 어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지의 대상이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두 번째 인용 구절은 로마서 8장 29,30절이다. 함께 읽어보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여기에 사용된 대명사에 주목하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즉, 예지의 대상은 의지의 굴복이나 믿는 마음이 아니라 사람들 자체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 11:2)라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지의 대상은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1장 2절을 살펴보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바로 앞 구절에 명시된 대로 그들은 “흩어진 나그네들”(벧전 1:1), 곧 그리스도를 믿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다. 여기에서도 예지의 대상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 자체이다.

이 성경 구절들을 보더라도 특정한 사람들의 행위, 즉 ‘회개와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헛된 주장에 불과하다. 성경은 결코 회개와 믿음을 예지의 대상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죄를 뉘우치고 믿음을 갖게 될지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회개와 믿음을 예지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예지는 항상 하나님이 미리 아신 사람들과 관련된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기 위해”(딤후 1:13) 노력해야 한다.

예지와 작정의 관계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앞서 인용한 처음 두 말씀이 하나님의 예지는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사도행전 2장 23절을 다시 보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둘째, ‘미리 아신 대로’ 내어주신 바 되었다. 예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로마서 8장 29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바로 앞 구절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면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는 그분의 작정, 또는 목적에 근거한다(시 2:7).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아시는 이유는 스스로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미리 아신 것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자 성경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신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선택의 근거나 이유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그들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왜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라고 고백할 따름이다.

로마서 8장 29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일부 죄인을 골라내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가르친다(살후 2:13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문구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아셨다(즉, 사랑하고 선택하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것은 예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죄인이 믿을 것을 아시고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그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믿는 것은 그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아시고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믿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공로가 되며, 그런 경우에 구원받은 죄인은 ‘자랑할’ 빌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엡 2:9).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행 18:27)이라고 정의한다.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믿음은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 믿음이 공로가 아니라면 선택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다. 로마서 11장 5절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선택은 은혜이고, 은혜는 공로와는 무관한 선물, 곧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순수한 선물이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지를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흔히 통용되고 있는 예지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결말을 꿰뚫고 계실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예정하셨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에 선행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엡 1:4).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의 본성을 타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찬양과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행 18:27)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은혜로”(롬 11:5) 선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