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자

5장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 하나님

루터는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가톨릭교회 제도를 비판했으나 루터의 개혁에는 동의하지 않음)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에 관한 귀하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입니다”라고 말했다. 저명한 학자가 광부의 아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에라스무스는 아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터의 비판은 매우 타당했다.

우리 역시 비록 이 타락한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오늘날의 설교자들 대다수를 비롯해 성경을 스스로 부지런히 연구하지 않고 게으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무작정 수용하는 이들을 향해 같은 비난을 쏟아놓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왜곡하고 모독하는 개념들이 거의 모든 곳에 만연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심지어 신자를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나님은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라고 질책하셨다. 믿음을 저버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원칙이 아니라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나태한 환상에 불과하고 사탄이 곳곳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나 목적이 마치 자신들의 계획이나 목적처럼 끊임없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유의지’라는 보루를 허물어뜨려 자신들을 ‘기계’로 전락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소유하신 능력은 무엇이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속죄의 능력은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을 모두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사람들은 그 능력을 죄로 병든 영혼이 원할 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치유책’ 정도로 비하시킨다. 또한 사람들은 성령의 불가항력적인 사역을 죄인들이 자신의 뜻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복음의 제안 정도로 축소시킨다.

희미하게 나부끼는 촛불이 정오의 태양에 비견될 수 없듯이 현대인들의 “신”은 성경이 증언하는 지고(至高)하신 주권자, 곧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다. 설교 단상에서 흔히 전달되거나 주일학교에서 언급되는 “신”, 또는 요즘의 종교 도서에서 논의되거나 감정적으로 들뜬 사경회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허구이자 감상(感想)의 산물에 불과하다.

기독교 밖에 있는 이교도는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어내는 데 비해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이교도는 육신의 생각으로 자신들의 “신”을 형상화시킨다. 사실 그런 신자들은 무신론자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지고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곧 그분을 아예 믿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신의 의지가 저항을 받거나 신의 계획이 좌절되거나 신의 목적이 방해를 받는다면 그런 신은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다. 그런 신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

피조물과 전능하신 창조주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괴리가 존재한다. 제아무리 강한 힘을 지닌 피조물도 예외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피조물은 한갓 그분의 손에 들린 진흙덩이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것을 영광의 그릇으로 만들기도 하시고, 산산이 깨뜨리기도 하신다(시 2:9).

천국과 세상의 거주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하나님을 대항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으신다. 지중해의 파도가 우뚝 솟은 지브롤터 암벽(스페인 최남단 지중해 연안의 높이 400미터에 달하는 바위산)에 아무 영향을 미칠 수 없듯이 피조물의 책동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에 흠집조차 낼 수 없다.

따라서 피조물이 지고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지극히 무익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방인들이 배교한 이스라엘과 연합해 여호와와 그리스도를 대적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웃으신다(시 2:4).

다음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주권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대상 29:11,12).

장차 천년왕국이 도래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로서 만물을 다스리신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라.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대하 20:6).

하나님 앞에서는 대통령도, 교황도, 왕도, 황제도 모두 메뚜기만도 못하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욥 23:13).

성경의 하나님은 가공의 군주나 상상이 빚어낸 주권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자 만군의 주님이시다.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남김없이 행하신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작정하신 일은 모두 이루신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기”(잠 21:30)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무생물과 이성(理性)이 없는 피조물과 인간을 비롯해 만물이 창조주의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홍해가 둘로 갈라져 물이 벽을 이루어 길을 내었고(출 14장), 땅이 갈라져 죄를 범한 반도(叛徒)를 산 채로 삼켜버렸으며(민 16장), 하나님이 명령하시자 태양이 멈추었고(수 10장), 아하스의 해시계가 10도나 뒤로 물러갔으며(사 38:8),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했고(왕상 17장), 쇠로 만든 도끼가 물 위에 떠올랐으며(왕하 6:5), 사자들이 다니엘 앞에서 유순하게 변했고, 강렬한 풀무 불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사르지 못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 135:6)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통치권은 인간의 의지를 완벽하게 통제하시는 능력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출애굽기 34장 24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내(하나님)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성들은 매년 세 차례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적대적인 이방인들, 곧 자신들의 땅을 정복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증오했던 종족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가나안 족속은 남자들이 없는 틈을 노려 아녀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챌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가나안 족속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사악한 자들의 의지를 통제할 능력이 없으셨다면 어떻게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라고 약속하실 수 있었겠는가? 성경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라고 말씀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뜻을 거역하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하고, 그분의 경고를 외면하고, 그분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구절들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내용이 모두 거짓일까?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자가당착에 직면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반론자들의 주장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인간의 사악함을 가리킬 뿐이고,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초점을 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행동 규칙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분의 영원한 작정은 세세한 부분까지 남김없이 성취된다.

신약성경도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지배권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에베소서 1장 11절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고 말한다. ‘역사하시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성경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이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독자적인 의지를 소유하는 자유로운 존재이며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자랑하지만 성경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 이것저것을 하리라”라고 말하라며 겸손을 가르친다(약 4:13,15).

이 진리 안에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는 확실한 안식처가 있다. 우리의 삶은 맹목적인 운명의 결과나 변덕스러운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가장 세미한 부분까지 영원 전에 작정되었다. 머리털 한 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빠지지 않는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참 신자에게는 진정 큰 확신과 위로와 힘이 되는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라는 시편 기자의 말을 기억하고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릴 줄”(시 37:7)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