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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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나의 생각 내려놓기

우리 자신의 추정을 따라 움직일 때, 우리는 형편없는 결정을 하게 될 수 있다. 성경적인 믿음과 추정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이번 장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두 종류의 추정에 대해 논할 것이다. 첫 번째는 우리가 실제로 절반만 순종하며 하나님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으면서도, 온전한 순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믿음을 기초로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자의적 추정으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경으로 일러주셨다.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우리 삶 가운데는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자신의 추정대로 결정한 다윗과 웃사

또 그 제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제단을 메게 할지며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출애굽기 27:6-8

다윗의 사람들은 블레셋 족속이 강탈해간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중이었다. 다윗은 언약궤를 운반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하고 엄한 지침을 알고 있었다. 장대(pole)를 이용하여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다. 수레로 운반해서도, 손을 대서도 안 된다.

하지만 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의 지침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이 추정한 방법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로 언약궤를 옮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사무엘하 6:3-8

웃사 역시 하나님의 지침이 아니라 자신의 추정에 근거하여 행동했다. 수레에서 흔들리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잡은 웃사의 행동은 어찌 보면 정당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이 언제나 항상 먼저이다.

우리도 웃사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칙을 중심으로 온전히 따르지 않을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내게 종종 상담을 요청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노력을 축복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그들과 조금만 깊게 대화해보면, 그들이 성경의 기본적인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결코 위반하지 않으신다. 어떤 것을 결정하고 행동에 착수하기 전, 혹여 성경 원칙을 위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살피고 점검하기 바란다.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친 모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는 중이었다. 모세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애굽을 빠져나온 백성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이 말랐고 마실 물이 필요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주셨다. 바위를 향해 명령만 하면 거기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민수기 20:7,8

모세는 홍해를 건널 때 지팡이를 사용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말로 명하여 또 다른 이적을 일으켜야 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에게 격분한 나머지 냉정을 잃고,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했다. 모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그 실수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귀한 유업을 상실하게 되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수기 20:9-12

모세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추정을 근거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가 이적을 행하도록 허락해주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모세가 불순종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이적을 일으키도록 허락해주신 까닭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완전함을 덮을 만큼 충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과도한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죄는 언제나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일회적인 우발적 사건으로 넘기지 않으시고, 결국 모세에게 가혹해 보이는 판결을 내리셨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결이었다.

하지만 모세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모세를 참아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가 처음 애굽 사람을 죽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에게 있던 오래된 문제였다(출 2:11,12 참조). 우리 삶에 죄가 있을 때, 우리는 영적, 물질적 유업을 받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계속해서 불순종의 길을 걸으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반드시 온다.
“더 이상은 안 되겠으니 그쯤 해둬!”
이 정도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바라시는 것들을 잃게 된다.

우리의 죄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깨우쳐달라고 하나님께 항상 구하라. 죄를 품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제멋대로 추정하지 말라!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추정에 바탕을 둔 믿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능히 공급할 수 있으시며, 또 기꺼이 공급해주신다. 그런데 하나님께 공급받기 위한 믿음에 대해 오늘날 정말 이상한 가르침이 교계 일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하고, 또 구원에 이르는 그 믿음이 우리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엡 2:8)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공급받는 것에 대하여는, 어떤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가 더 힘써 노력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암송하면서 묵상하면 지금보다 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고, 그렇게 하나님께 더 큰 믿음을 나타내 보이면 하나님의 공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그 가르침은 성도들의 ‘형통’(亨通)을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과 직접 결부시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 물론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물질적, 금전적으로 축복해주시는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축복이 물질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때도 분명히 있다.

요셉은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권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복을 받을 받은 사람이라 묘사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셉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 밑에서 종살이를 하는 사람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에서 오는 믿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였다가, 즉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추정을 근거로 행동했다가 결국 쓰라린 실망을 맛보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성경적 지식과 해석을 근거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또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공급받는 참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과 살아 있는 관계로 친밀한 의사소통을 하기 원하신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 바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은 우리 마음에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은 다시 우리 마음에 신뢰라는 의미의 믿음을 낳는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이적을 일으키는 믿음,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오로지 우리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생한 말씀을 우리가 직접 듣는 것에서 온다.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듣지 못하면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는 믿음은 단지 어떤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될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암송하며 묵상하는 데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 믿음은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에서 온다.

따라서 그런 이상한 가르침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이런 저런 지침을 주고 있다고 제멋대로 추정하는 사람들, 자신의 성경적 지식과 해석에 근거하여 추정한 것들을 단순하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의 문제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풀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여 낙심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공급을 받기에 충분한 믿음이 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럴 때, 그들은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많은 경우 절망적인 상태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하나님께 공급받는 믿음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에 균형을 잃은, 사사로운 견해들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견해들을 성경의 진리와 서로 혼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압박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역사하시도록 만들 수 있는가? 우리가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한 공식대로 행동했다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해결책을 우리에게 내주어야 할 의무를 지는가? 하나님은 그런 꼭두각시가 결코 아니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으려면, 하나님께서 그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꼭 들어야 하며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이상한 가르침에 대해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데는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병에 걸렸을 때, 치유를 구하면서 기도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이 기도로 질병을 치유받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 문제가 있었지만 치유를 받지 못하였다(갈 4:15 참조). 그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드로비모가 병들어서 밀레도에 남겨두어야 했고(딤후 4:20 참조), 디모데에게는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써보라고 권유했다(딤전 5:23 참조). 바울은 분명 자신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했고, 또 드로비모와 디모데의 병을 위해서도 기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믿음과 기도는 그 자신의 질병이나 그들 두 사람의 병을 치유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바울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지 못한 것일까?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해서 병 고침을 받지 못한 것일까?

만일 요즘 그 이상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바울이야말로 당연히 병 고침을 받고도 남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질병의 치유와 하나님의 능력 나타남이 하나님의 은혜와 결합된 우리 믿음의 결과라는 것과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확증을 얻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성경적 믿음의 두 가지 요소

요컨대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깊이 기도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즉 하나님의 살아 있는 생생한 말씀에 대한 믿음이다.

이 둘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두 가지 사례로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보겠다.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국제 그리스도인 상업회의소’(International Christian Chamber of Commerce)의 창립자 군나르 올슨(Gunnar Olson)은 몇 해 전 그의 공장에서 이적을 일으키신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는 현재 스웨덴에서 비닐포대를 제조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고, 유럽 전역의 농장주들이 건초더미를 보관하기 위해 그의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때는 추수철이어서 회사 직원들이 많은 양의 비닐포대를 선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적할 준비를 끝마쳤을 무렵,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창고에 쌓여 있는 모든 비닐포대의 입구 부분이 뚫려 있어야 하는데, 막혀 있었던 것이다. 제품 개발실 기술자들은 포대 입구가 막혀버린 제품 전량을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손 써볼 방법이 없었다. 그의 회사는 파산 위기에 봉착했다. 군나르와 그의 가족들은 그 재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고 성령께서 그의 아내와 딸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어요. 그런 하나님께서 비닐포대가 무슨 대수겠어요?”
그의 딸도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 굴복해서는 안 돼요.”

군나르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이적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계속 기도하였다. 그들은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에 근거하여, 그 중대한 문제의 ‘산’을 옮기는 권세를 취하였다. 그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기는 권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일, 그들은 창고로 가서 비닐포대가 쌓여 있는 모든 곳에 손을 얹고, 포대 입구가 뚫리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창고에 쌓여 있는 모든 비닐포대에 기도하기까지 몇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다음 날, 공장 직원들이 비닐포대를 다시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모든 비닐포대 입구가 원래 상태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군나르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먼저 그는 집으로 달려가 아내와 딸에게 그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그 문제를 놓고 한마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문제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와 가족들을 통해 그들이 취해야 할 조치를 확증해주셨다.

그들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받은 레마의 말씀, 곧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을 굳게 믿는 믿음을 나타내보였다. 그리고 그 결과, 정말 믿기 어려운 이적이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는 것과 관련된 성경적인 믿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의 기도

내가 인생의 중요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일보다 책 쓰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책의 재고가 너무 많아 보관할 곳이 없으니 내게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책들이 담긴 상자들이 집에 도착했다. 나는 그것들을 지하실에 쌓아두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열왕기상 17장에 기록된 사르밧 과부 이야기와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공급 원칙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통해 공급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성령께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내게 지침을 주심으로 나를 이끄시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성령께서는 즉시 지하실로 내려가 책 상자들 위에 손을 얹고,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라고 명령하는 겨자씨만한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고 인도하셨다. 그래서 지하실로 내려가 책 상자들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이 책들이 여기 지하실에 쌓여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구하오니 이 책들을 여기 지하실 밖으로 꺼내주소서. 그리하여 이 책을 읽음으로써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의 축복을 받을 이들의 손에 들어가게 해주소서.”

그렇게 기도를 끝마치고 세 시간쯤 지났을 때, 한 일터사역 단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하실에 쌓여 있던 내 책 13상자를 주문한 것이다. 그때까지 그렇게 많은 책을 한 번에 주문받은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