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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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다양한 소통 통로 열어두기

앞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로고스’ 말씀과 ‘레마’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있고, ‘귀에 들리는’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번 장과 다음 몇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지침을 주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택하신다는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기 위해 주로 사용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적 은사를 주시고, 그런 은사를 받은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신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 14장에서 이러한 영적 은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중보기도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골로새서 4:12

하나님께서 내게 하나님의 길을 더 깊이 깨우쳐주기 시작하셨을 때, 다른 많은 영역에서도 나를 가르치셨지만 무엇보다 중보기도의 영역에서 더 많은 것을 가르치셨다.

내가 여기서 ‘중보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뜻한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차원의 교제로 들어가기 위한 기도이며, 또한 한층 더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기도이다.

중보기도의 사람

내가 이 중보기도를 처음 접한 것은 인생의 위기상황 속에서 중요한 과정을 겪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한 사역 단체에서 나에 관한 기사를 회보(會報)에 게재하였는데, 그 기사를 읽은 잔 크리스티(Jan Christie)라는 여성이 나의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녀는 내가 그녀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일로 외부에 나가 있어서 그녀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우리 사무실을 방문하여 우리 회사의 여직원을 만났다. 잔은 회사 여직원에게 함께 잠시 기도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녀는 나를 비롯한 우리 회사 직원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를 마친 뒤, 기도하던 중에 세 남자를 보았다고 말하면서 각 사람의 특징과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곰곰이 듣던 여직원은 말했다.
“당신이 방금 묘사한 세 남자는 우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중보기도의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잔은 이후로 지금까지 중보기도 지도자로 사역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내게 소명으로 주신 ‘일터사역’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소명, 중보기도

‘중보기도의 사람’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엡 6:18 ; 골 4:12 참조). ‘중보하다’(intercede)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간청하거나 요청하는 것”이다.

중보기도는 모든 신자들이 받은 제사장적인 소명이요(벧전 2:5 ; 출 19:6 참조), 우리 안에서 기도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바로 성령이시다(롬 8:26,27 참조). 특정한 신자들이 받은 영적인 은사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소명이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중보기도의 소명을 받아 예언의 은사까지 받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마귀와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 마귀의 임박한 공격과 지뢰밭에 대해 경고해줄 수 있는 최전선의 척후병들(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정찰하고 탐색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과 긴밀하게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중보기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중보기도자들의 존재 이유

몇 해 전, 일터사역에 동참할 사역자들을 만나기 위해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일터사역을 어떤 방향으로 할지를 놓고 고심하는 중이었다. 그 문제가 정말 하나님께서 행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문제인지, 아니면 나의 문제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중보기도 동역자인 잔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어떤 문제로 염려하고 있으니 그 문제를 위해 기도해달라고만 부탁했다. 나는 그 문제를 ‘나의 사역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잔의 메일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께서 나를 격려하여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을 담대하게 착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나의 사역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담대하게 착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겠는가? 내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어구, 즉 ‘나의 사역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문제라는 어구를 그녀가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내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던 것이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염려하고 있던 일을 담대하게 실행에 옮기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침을 주기 위해서 중보기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보기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원수 마귀의 위험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지침을 확신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보기도의 사람들을 군대의 정찰병에 비유하기도 한다. 정찰병들은 적이 어디에 위험한 지뢰를 매설했는지 탐색하고 정찰한다. 그 결과를 일반 병사들에게 알린다. 성급하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기 전, 하나님의 정보원들에게 확증과 확신을 얻는 것이 언제나 안전한 길로 걷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계신다. 또한 중보기도가 어떻게 우리 개인의 삶과 일터에서의 삶에 통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계신다. 나는 중보기도에 전념하는 사람들, 중보기도를 자신의 삶에 중요한 일부로 여기고 가정과 직장에서 더 많이, 더 자주 중보기도를 드리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섯 번째 항소 사유

지난 몇 해 동안, 하나님께서 정말 귀하게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만난 사람 중 나이지리아 출신의 에메카 느완크파이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는 나이지리아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난 몇 년에 걸쳐 중보기도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셨다. 지금 그는 ‘국제 그리스도인 상업회의소’에서 중보기도 지도자로 사역하면서 나이지리아를 위한 중보기도를 인도하고 있다.

다음 이야기는 몇 해 전 ‘제2차 일터사역 지도자 회의’가 열렸을 때, 그에게 직접 들은 그의 체험담이다.

얼마 전, 저는 중요한 항소심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그 재판을 준비하면서 저는 다섯 가지 항소 이유를 판사에게 제출했습니다. 저는 그 재판을 위해 많이 기도했고, 제 아내도 기도했고, 사무실 직원들도 기도했습니다.

혹시 그 재판과 관련된 유용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법원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만나보았지만, 관련 법률이 제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터라 판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참고 자료도 전무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판 당일 아침 법원으로 향했고, 법정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항소 사유에서 네 번째 항소 사유를 철회하고, 다섯 번째 항소 사유에 대해서만 논하라.”

제가 변론할 시간이 되자, 판사가 말했습니다.
“원고(原告) 측 변호인은 변론하세요.”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첫 번째 항소 사유에서 네 번째 항소 사유까지 철회한다는 것을 이 법정에서 알리고 싶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변호인, 그게 확실합니까?”
“네, 판사님. 확실합니다.”

“좋습니다. 첫 번째 항소 사유에서 네 번째 항소 사유까지 삭제하기로 하겠습니다. 변호인은 다섯 번째 항소 사유에 대해 논하십시오.”
저는 다섯 번째 항소 사유에 대한 주장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곧 상대편 변호사가 논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10분 이상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입을 여는가 싶더니 곧 다물었고,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면서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원고 측에서 첫 번째 항소 사유에서 네 번째 항소 사유까지 철회하다니 심히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상대편 변호인은 그렇게 발언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고, 재판을 포기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제가 이미 판사에게 제출했던 항소 사유 가운데 첫 번째 사유에서 네 번째 사유에 대해서만 변론을 준비하고, 다섯 번째 사유에 대해서는 변론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그 재판에서 이겼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롭게 하는 금식기도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사도행전 13:2,3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간청하기 위해 우리 공동의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부으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몇몇 지체들에게 중보기도와 예언의 영역에서 영적 은사를 주시며, 심지어 특정한 상황에 맞는 지혜의 말씀도 갖게 해주신다.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금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금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특별한 지침을 주셨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불러 시키시는 일을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고 그들에게 명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행 13:1-3 참조). 그때는 전략적으로 교회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금식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중요한 한 방법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한다. 금식은 우리가 진지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실제 행동으로 보여드린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금식을 할 때, 처한 문제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금식은 육체적인 것이지만, 우리 마음이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더욱더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들어가도록 도움을 준다.

금식기도를 통한 하늘의 메시지

1997년, 나는 인생의 위기상황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때에는 정말 모든 것들이 뒤로 후퇴할 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나는 전에 하던 광고 대행업을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새로운 소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나는 이 금식기도가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금식기도를 연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금식 14일째 되던 날, 이렇게 된 바에 40일 금식기도를 결단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40일 금식기도를 마쳤다.

그런데 40일 금식이 끝나는 날짜가, 내가 몇 개월 전에 참석하기로 계획했던 모임이 시작되는 날짜와 일치했다. 나는 40일 금식으로 몸이 몹시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예정한 대로 그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날 밤, 브래들리 스튜어트라는 이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중보기도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위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면서 성경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가 말씀을 읽는 순간, 나는 그것이 나를 향한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가 읽었던 그 성경 구절이 바로,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분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속적으로 들려주셨던 말씀이었고, 나를 위해 중보하던 중보자도 한 달 전 그것과 유사한 메시지를 내게 전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호세아서였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세아서 5:15-6:3

그 중보기도자는 호세아서의 한 대목을 읽은 뒤, 주님께 받은 메시지를 그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를 위해 전해주었다.

제가 주님께 받은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몇 년은 심오한 준비의 시기였다. 그동안 나는 너와 너의 일이 찢어지고 부서지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를 회복시키고 치유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너를 회복시키려는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동안 내가 네게 무엇을 가르쳐왔는지 네가 깨닫기를 원한다. 내가 곧 씨를 뿌릴 것이니 너는 그저 기다리면서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내가 그 씨앗을 다스리고 있으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내가 그 씨앗을 키울 것이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 이제 내가 단비를 내리면 그 씨앗이 싹을 틔울 것이라’라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 때 그 중보자가 그 모임에 참석한 ‘누군가’를 위해 읽어주었던 성경 말씀과 그가 들려주었던 메시지가 바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분투하던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의 확증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그 모임이 있기 한 달 전, 다른 나라에 사는 한 친구에게 들었던 메시지와도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에게 들었던 메시지를 아래에 그대로 인용했다. 두 메시지가 얼마나 유사한지 직접 확인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자네의 최악의 상황이 끝났고, 또 과거의 고통이 되풀이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게 말씀하셨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 자넨 영혼의 원수 마귀가 자네에게 속삭이는, 그런 모자란 아들이 절대 아니네. 눈을 높이 들어 자네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내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게나.

자네는 지금 이 순간부터 그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보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게 될 거야.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보여주실 거야. 자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법을 배웠어. 이제 하나님께서 자네의 삶에 늦은 비를 내려주실 것이네. 그것이 자네를 촉촉하게 적셔줄 것이고, 메마른 과거의 아픔들을 모두 잊게 해줄 거야.

지금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머금은 구름들이 모여들고 있어. 자네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들판에서 새로운 협력자들과 함께 새로운 곡식을 키울 것이고, 새로운 단을 거둘 것이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증해주신다. 금식은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언과 지식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18,19

어떤 사람이 예언의 은사나 지식의 말씀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면 내가 말하는 것에 크게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것들의 체험을 허락하지 않는 신앙 환경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은사들을 은혜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내 삶에 보내주셨다.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하지 못해 주춤거리고 있을 때, 그들은 구체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증해주는 데 말할 수 없이 귀한 역할을 한다.

예언은 우리의 과거나 미래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견고히 설 수 있게 격려한다. 지식의 말씀은 우리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념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지침을 전달하기 위해 종종 다른 사람을 들어 쓰시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방식이 반드시 예언이나 지식의 말씀처럼 특별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상의 대화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계획과 지침을 전달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우리 영혼에 강렬한 불꽃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말을, 또 다른 사람을 통해 재차 내게 들려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확증해주실 수도 있다. 이러한 유형의 상황이 일어난다면 무심코 넘기지 않도록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주시고, 중대한 결정에 직면해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공급하실 수가 있다.

꿈과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 16:8-10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꿈과 환상을 통해 전도 사역에 관한 하나님의 지침을 공급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을 사용하셔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침이나 계시를 주시기도 한다.

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인생의 중대한 위기 상황에 봉착한 지 6개월쯤 지났을 때, 한밤중에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깬 적이 있었다. 아주 간결했지만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그 꿈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꿈에서 본 것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내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 꿈은 얼토당토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 꿈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일터사역에 몸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그 꿈의 의미를 돌이켜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나의 장래 모습을 내게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중보기도 지도자 잔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식당에서 마주 앉아 기도했었다. 당시 그녀는 기도를 마친 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 모습을 환상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그때 그녀가 보았던 환상과 후에 내가 꾸었던 꿈은 동일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환상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사도행전 10:17,18

어느 날, 베드로가 여느 때처럼 기도하러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환상을 보게 된다. 환상의 내용인즉,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들이 담긴 그릇을 하늘에서 내려보내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명하신 것이었다.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고, 그러한 과정이 세 차례 되풀이된 후에야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했다. 마침 그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다. 베드로는 좀 전에 보았던 환상이 무슨 뜻인지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라고 베드로를 권고하셨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들과 어울리기를 거부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어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즉시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 환상 가운데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집으로 초대하여 만나라고 말씀하셨다(행 10:1-48 참조).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하여 사건들을 조화롭게 편성하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이다.

연속적인 환상과 어린아이의 꿈

한 번은 서로 다른 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이 나에 대한 동일한 환상을 본 적도 있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에 기도하는데, 나의 삶이 한 그루의 나무로 보여주는 환상을 본 것이다. 그들이 본 나에 대한 환상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본 환상에는 앞 사람이 보았던 환상에 없던 세부적인 내용이 부가되었다.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조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다섯 살 된 조카가 우리 집이 불도저에 쓸려 나가는 장면을 꿈에서 보았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몇 개월 전, 우리 집과 땅을 부동산 개발회사에 팔기로 계약했고, 그 회사가 대단위 주택단지 조성을 위해 우리 집을 철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섯 살 된 조카는 그런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