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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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결정 방식 정하기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22

나는 광고회사의 경영자로서 20여 년을 광고대행업에 몸담으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으로 결정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두 가지 결정방식

첫 번째 방법은 ‘찬반(贊反) 비교법’으로써, 결정해야 할 이유와 결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정리하여 서로의 장단점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느 쪽이든 가장 이치에 맞는 쪽으로 최종 선택을 하게 된다. 나름의 논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예상되는 결과에 기초한 결정법’이다. 우리가 하는 결정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에 기초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결정을 내리는 순간마다 서로 대립되는, 즉 ‘옳은 것’(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예상되는 결과’라는 두 요소가 서로 그것들을 기초로 결정하라고 맹렬히 우리를 몰아치고 있음을 의식한다.

인간에게는 어떤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끔 정할 능력이 없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상되는 결과에 기초해 결정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에서 예상된 결과에 기초하여 결정을 내리고 있다. 나 역시도 사업을 하면서 어떤 결정이 내게 금전적으로 좋을지, 아닐지 예상되는 결과를 염두에 두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축복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우리의 결정 과정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두 방법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이 우리의 결정 과정에서 말 그대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그에 관한 좋은 예화가 기억난다. 내가 광고업에 몸담고 있을 때, 경기침체로 매달 엄청난 적자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아는 분을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논리적으로 한 회사의 경영자가, 더욱이 그런 불경기에 열흘씩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다. 또한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는 데 드는 경비도 충당할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너무나 강하게 느껴졌고,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모임 등록 마지막 날, 아는 분이 내게 2,500달러를 건네면서 그 모임에 참석하라고 권하여 극적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모임은 나의 영적, 직업적 순례 여정에서 실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만일 당시 내가 찬반 비교법이나 예상되는 결과에 기초해서 결정을 했다면, 분명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크고 귀한 축복을 놓쳤을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 vs 사람의 생각

히브리 문화의 영향 아래 놓여 있던 초대교회의 교인들, 즉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순종’으로 지혜를 얻었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으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논리와 종종 일치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그러나 교회가 소크라테스(Socrates, 고대 그리스 철학자)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고대 그리스 철학자) 같은 학자들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화와 접촉하면서 ‘지식’에 기초한 그리스적인 방식이 ‘순종’에 기초한 히브리적인 방식보다 교회의 교육과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래의 표는 성경의 지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히브리적인 방식과 그리스적인 방식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히브리적인 방식 VS 그리스적인 방식
인간의 마음에 호소함 VS 인간의 지성에 호소함
과정을 중요시함 VS 프로그램을 중요시함
순종을 우선시함 VS 정보를 우선시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함 VS 집단 통제를 강조함
사랑에서 나온 순수함을 강조함 VS 행동에 기초한 봉사를 강조함
성숙한 신자를 만듦 VS 피상적인 신자를 만듦

그리스 사람들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이성과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교회는 수세기를 거치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지식에 기초한 방식이나 프로그램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바라실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결정하게 될 때, 히브리적 방식을 따라 결정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결정하기를 바라신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 기초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논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이에 관한 훌륭한 예가 된다.

전심으로 순종했던 사도 바울

사도행전 21장에는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들, 아가보라는 이름의 선지자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를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령의 계시를 받은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며 일차적으로 권고했고, 그 다음에는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예언적 행위(바울의 허리띠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함)로도 전했지만 끝내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으로 그 대목을 읽어보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4-14

예언에 대한 엇갈린 해석

그러면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 심지어 성령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예언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행동한 것일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박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정보는 진짜였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대답으로 미루어, 그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바울은 분명,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예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언의 의미에 관한 그들의 해석, 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니 ‘올라가지 마라’는 그들의 해석에는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을 당하게 될 거라는 성령의 예언을 받고 바울을 말리지만, 바울은 동일한 예언의 말씀을 전해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예언의 말을 전하면서 그 의미를 해석해주고 행동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나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예언하는 사람이 꼭 그런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예언의 말씀을 전달하는 메신저일 뿐이다. 예언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이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언의 말씀을 받은 사람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를 통해 미리 알려주신 것일 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금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은 예언을 받은 사람들의 생각이지, 성령님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울을 설득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올라가는 일이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고 확고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것이 우리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 그것을 언제나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예상하는 결과에 기초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결정은 성경적인 결정 방법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결과가 자명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최종 결정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사용하여 결정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고 숙고하는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의 갈림길에서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모든 면들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숙고하기를 기대하신다. 나는 이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요인을 충분히 고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신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누가복음 14:28-30

사실을 수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을 정탐하기 위한 선발대에 뽑혀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온 뒤 그곳에서 목격한 것을 사실 수집의 형식으로 보고했다. 그 두 사람은 보고를 마친 뒤,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전진하자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은 두 사람의 결정에 반대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결정이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의 의견이 엇갈린 것은 그들이 동일한 방정식에 서로 다른 믿음과 두려움을 대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 사실을 수집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을 수집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결정의 중요 요소로 삼아야 한다. 그 일이 우리에게 타당하게 느껴지는지, 아닌지를 결정적 요소로 삼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순전히 자신들의 이성과 생각을 기초로 모든 결정을 했다면, 과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도는 것을 전투의 승리를 위한 작전으로 택했을까?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얻은 동전으로 성전 세금을 내라는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려 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보시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이성에 어긋나는 명령을 하신 예들은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타당한 생각과 논리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이적을 일으키시곤 한다.

사울의 반쪽 순종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매우 ‘까다로운’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매우 까다로운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그대로 정확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순종으로 인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원칙이 사울 왕의 삶에서 좀 더 명확하게 입증된다. 사울 왕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부분적으로 순종한 사람의 삶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불순종으로 괴로움을 당하였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선지자 사무엘은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신정체제(神政體制)로 남아야 한다고 분명히 경고하였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무엘상 12:24,25

그러나 사울은 몇 가지 사건에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 사무엘에게 불순종하였고, 그 불순종은 사울 왕 자신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행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가 처음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했을 때, 선지자 사무엘을 7일 동안 기다리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7일을 기다려도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사울 왕은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블레셋과의 대대적인 전투를 하기 전, 하나님의 은총을 위해 자기 손으로 번제를 드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그에게 주신 지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사울은 영적으로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에게 마땅히 순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사무엘에게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불순종은 그의 통치 기간 단축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삼상 13:7-14 참조).

또한 사울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공격하라고 명하셨을 때에도 불순종했다. 그는 아말렉 왕과 가축들과 값진 물건을 포함하여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을 공격하여 많은 것들을 파괴하였지만, 아말렉 왕과 좋은 가축들은 살려두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고, 사무엘은 그 말씀을 들은 즉시 사울을 대면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5:22,23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백성들의 압력이 너무나도 두려워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고 자백하였다. 그는 사무엘의 겉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면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말씀을 버림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다.

사울의 삶을 보면서 나 역시도 평소 사울처럼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된다. 사울은 분명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경건의 모양을 지닌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순종하지 못하여 불행을 당하였고,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여 하나님께 가혹한 말까지 듣게 되었다. 성경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상 15:35

하나님께 이런 말을 듣다니, 정말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생각만 해도 순종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될 것이다. 철저한 순종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 결코 이런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