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걱정과 염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평강을 누리게 되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2012년 가을, 한국 방문 중에 청량리에서 한 청년을 만나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나온 지 한참 후에 아이패드(iPad, 이동식 태블릿 컴퓨터)를 놓고 온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식당에서 잘 보관해주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제 심장은 더 크게 뛰었습니다. 왜 그런 감정과 함께 심장이 뛰는 육체의 현상이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이패드를 잃어버린 사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원인은 그 일에 대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아! 조금만 더 꼼꼼히 챙겼더라면, 그때 다른 위치에 놓았더라면….’
이런 생각이 제게 불안과 아쉬운 감정을 주었고, 그것 때문에 심장이 뛴 것이었습니다. 아이패드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아, 어차피 새로운 모델을 사려고 했는데 뭐 잘되었네!’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겠습니다. 제 아버지는 주님을 만나시기 전에는 주사(酒邪)가 심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일이 화가 날 일인 줄 알았기에 그 일이 벌어지면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에서는 평소에는 엄격하고 무섭고 구두쇠인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순한 양이 되어 아들에게 용돈을 준다고 한다면, 그 아들은 아버지가 술 마시고 들어오시는 일을 오히려 기다리고 좋아할 것입니다.
같은 경우인데, 왜 우리 집에서는 화가 날 일이고, 그 집에서는 기쁜 일일까요? 사건 그 자체에는 화나 기쁨이라는 감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화가 날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일까요? 그저 아버지가 술 마시고 들어오시는 일일 뿐입니다. 화는 우리 속에 있는 것이고, 화라는 감정은 내가 생각해서 불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독자(獨子)로 성장하고, 깨어진 가정에서 여러 가지 결핍을 체험하면서 받은 상처를 술로 푸시는구나. 아버지가 되는 훈련을 하나님께로부터 못 받으시고 열등감에 인생을 한탄하며 술로 달래시는구나. 불쌍한 아버지께 잘해드려야지.’
만약에 제가 이런 생각으로 마음을 지켰다면 화가 나지 않았겠지요. 아마도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오실 때마다 아버지께 더 잘해드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화를 불러내는 생각을 버리면 그 감정이 사라지기에 “생각을 지키라”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패드를 잃어버린 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버리려고 노력을 해도 좀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15분 정도가 지났는데 갑자기 암송말씀이 입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안에 계신 성령님께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말씀은 아이패드를 잃어버린 상황과 별로 상관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마가복음 1장 첫 부분의 말씀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곧바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이 가라앉으며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롬 14:17). 이것이 바로 입술과 혀의 훈련됨으로 생각을 지키며 내 안의 성령님을 바라보는 기도 훈련의 결과였습니다.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암송으로 마음을 잘 지킨 그날, 놀랍게도 새 아이패드가 생겼습니다. 제가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목사님께서 선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또 다른 분이 주셔서 갑자기 두 개가 생겼습니다. 말씀암송으로 마음을 잘 지킨 것에 대해 주께서 격려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