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핵심
말씀으로 기도하라

12. 한국교회의 성경암송 전통

세계 근대 기독교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평양대부흥의 현장 한가운데 있던 조지 매큔(George McCune)은 평양대부흥운동이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평양대부흥에 성경암송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2000년에 발간된 《성서한국》(통권 제46권 2호)에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이덕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 중 일부를 대한성서공회 사이트에서 발췌했습니다.


초기 사경회 공부는 성경 외우기로 시작되었다. 암송 문화에 익숙했던 한국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웠다. 선교사들은 이런 한국 교회의 성경암송 문화에 대해 경이로운 찬사를 보냈다. 일제 시대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를 역임한 데밍의 증언이다.

“개성에 맹인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아들이 그의 눈이 되어 복음서 전체를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서 전체를 순서대로 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무 장, 아무 절이나 물으면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속장인데 그는 말씀 공부에 전념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매서인(예전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을 이르던 말)인데 성경에 통달하여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 그 장과 절까지 정확히 집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교인들 가운데 이 정도 할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서양 생활에서는 이곳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느낄 수 있는 명상과 침묵을 통해 성경 배우는 깊은 맛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교인’은 개성의 전설적인 ‘맹인 전도자’ 백사겸(白士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맹인이 되어 개종 전에는 명복(名卜)으로 이름을 날리던 점쟁이 백사겸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동안 점쳐서 번 재산을 정리하여 없애 버리고 지팡이 하나 잡고 전도 길에 나서 고양, 파주, 장단, 개성 등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훗날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는 아들(백남석)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외워 버린 것이다. 사경회는 이같이 성경을 외우는 사람들 이야기로 흥미진진했다.

‘성경암송’은 한국 교인들이 받은 특별한 ‘은사’(恩賜, charisma)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은사는 맹인처럼 육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었다. 그중에도 한센병(나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인 여수 애양원 사람들의 성경암송이 유명했다. 일제 말기인 1939년, 애양원 사경회 강사로 참여했던 남장로회 선교사 뉴랜드의 증언이다.

“애양원 식구 전체가 모인 가운데 사경회 마지막 행사로 성경암송 대회를 했습니다. 우리 외국인 선교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성경 중에서 아무 곳이나 지정하면 그들이 그것을 외우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나온 환자는 신약 전체를 외우는 남자 환자였습니다. 그는 이곳에 들어온 지 수년 되었는데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병도 병이려니와 흉폭하기 짝이 없는 거지 대장이었답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와 성경을 접하고부터 사람이 변해 놀라운 기억력으로 성경을 외우게 되었답니다. 그는 시력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손가락도 없었고 아래턱도 반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행복한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택했고, 우리는 20장을 외워 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외우기 시작하자 다른 환자들은 성경을 펴서 그가 한 자라도 빼먹지 않은가 손으로 짚어 가며 확인했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 다음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여자 노인이 나와 기쁜 표정으로 시편 23편을 외웠습니다.”

애양원의 성경암송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애양원 식구들은 지금도 매주 모여 성경을 암송한다. 애양원에서 성경암송반을 이끌고 있는 양재평 장로는 열아홉 살 때(1942년) 이 병에 걸려 애양원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서른 살 때 시력까지 잃어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손가락이 뭉그러져 점자도 읽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성경을 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시력까지 잃게 되자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하소연했어요. ‘눈까지 가져가시면 저보고 무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이런 음성이 들려요. ‘귀하고 입은 남겨 두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그는 20년 만에 신약 성경을 외워 ‘성경 녹음기’가 되었다. 신약 전체를 순서대로 줄줄 외울 뿐 아니라 “빌립보서 3장 12절” 하면 즉시 그 구절을 정확하게 기억해 외운다. 살아 있는 ‘성구 사전’이다. 그래서 애양원 방문객들은 성경을 줄줄 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은혜가 된다. 그에게 강해나 주석을 기대해선 안 된다. 그는 본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본 뜻을 왜곡시킬 위험이 많은 주석보다는 본문에 충실한 신앙, 바로 그것이다. 이같이 사경회에서 출발한 ‘성경암송’ 문화야말로 한국 교회의 자랑스런 전통이다. 하긴 성경암송대회가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 담긴 책인 성경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 쓰거나 소리 내어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암송입니다. 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암송할 때 우리는 네 가지 차원에서 말씀을 먹게 됩니다. 처음에 눈으로 보면서 한 번 먹고, 그 다음에는 입술을 움직이면서 그리고 입술로 소리 낸 것을 귀로 들으며, 끝으로 반복 암송하게 되어 마음과 영으로 계속해서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눈으로만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암송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읽는 것과 소리 내어 암송하는 것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암송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 근대 교회사 가운데 한센병이나 시각장애우들이 암송에 더 집중을 했다는 자료를 대하면서 저는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육체의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분들은 심령이 가난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에 더 깊이 새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성도들이 암송이 좋은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지식만을 추구하는 교만함 때문은 아닐까요. 《더 있다》(이태형 저, 규장 간) 라는 책에서 이민아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체험에 따라서 불완전한 신학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자기 체험에 근거해 하나님을 믿으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니 문제가 됩니다.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중략) 우리 인생에서 기적이 없는 이유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소화할 수 있는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거기 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적인 종교입니다. (중략)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에 하나님을 가둬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의 표현에 대해 이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우리의 생각 패러다임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키는 트랜스포밍 마인드(Transformaing Mind)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이 목사에 따르면 로마서 12장 2절과 같이 생각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영(靈)이시고 제한이 없으신 하나님을 담는 포도주 부대가 될 수 없다.

새로운 포도 부대가 되기 가장 힘든 사람은 과거의 포도부대가 그럴듯한 사람이다. 거기에 그대로 담아도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포도 부대는 찢어지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 포도 부대를 찢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결코 담을 수 없다. 하나님을 담지 못하면 기적의 삶은 불가능하다!

혹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큐티가 자아를 그대로 살려둔 채 하나님을 이해해서 깨달으려 하는 모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이해해보려고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었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염려와 두려움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그 생각의 뿌리가 자아입니다. 주님은 기도하기 전에 염려부터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아부인을 먼저 강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내 안에 있어 나와 함께 보좌에 앉아 있고(엡 2:6) 나는 네 안에 있는데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니? 무엇을 구하고 있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갈 2:20, 엡 2:5,6).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 안에 성령으로 계십니다.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보좌 앞에서 불변하시는 말씀(막 14:31)을 소리 내어 선포하며 찬양과 경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기름부으시며, 주의 영광과 의와 나라가 임하여 우리의 자아를 덮게 됩니다.

시편 1편 2절에서 ‘주야로(day and night)’는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이라는 뜻입니다. 즉, 복 있는 사람은 주의 말씀이 즐거워서 하루 종일 소리를 내며 암송하며 성령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