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고 알아가며 교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으며, 어떻게 말씀을 보존하여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했는지를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 체계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에 미혹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9장 20절과 21절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바울은 율법 없는 자도 아니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도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 아래 있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히브리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주장하며 지금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
히브리적 관점으로 성경보기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어야 된다는 차원에서 강조되면 분명히 문제가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그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율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우리가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보기를 할 때, 자유케 하시는 성령님은 구원을 얻기 위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오류를 범하게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체험이 있는 우리에게 율법 아래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볼 수 없는 율법 속에 숨겨진 놀라운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 행하는 사람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차원에서 히브리적 관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히브리 문화 안에서 히브리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우선 그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우리는 그들의 문화와 언어 속에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복음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를 비교해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동적(動的)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움직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임마누엘로 항상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면 그 ‘임마누엘’이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모든 다양한 역사하심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적 사고는 정적(靜的)인 사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정을 해결해줄게”, “깨진 관계도 해결해줄게”, “법적 문제도 해결해줄게”라는 식으로 일일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야 믿는 사고입니다. 즉, 하나님을 작은 이성과 경험에 의해 제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는 하나님 중심 사고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설명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만물들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헬라적 사고는 인간 중심 사고입니다. 헬라(그리스) 신화를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헬라의 가장 위대한 신인 제우스는 아내인 헤라를 두고 딴짓을 하다가 들켜서 그녀를 피해 도망을 다닙니다. 또한 한 여자 때문에 여러 전쟁이 일어납니다. 대부분 신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여 다툼과 살인, 복수극이 벌어집니다. 상당히 인간 중심적입니다. 사람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기에 그들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그리스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좋아합니다.
유대적 관점은 하나님 중심, 관계 중심이며 직관적이고 동적이며 통전(通典)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되어도 일단 순종을 통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시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반면에 헬라적 관점은 인간 중심, 사실 중심이며, 어떤 대상에 대하여 먼저 논리적이며 분석적으로 접근합니다. 헬라적 사고의 틀에서 지식은 단지 인격이 아닌 정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해가 되어야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에게도 영이 있습니다. 이성은 혼에 속해 있어서 영보다는 하위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성적 차원보다는 영적 차원에서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인 말씀암송을 통해 하나님께 영적으로 먼저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교회에서 유대적 유산들이 제거되면서 교회가 헬라적 사고의 기틀 위에서 발전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영향을 크게 받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서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서구 기독교의 영향하에 탄생된 것이 헬라적 관점의 큐티인 것이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헬라적 문화와 사고의 체계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정확한 순서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롬 2:9,10).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복음은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온 인류의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자유케 하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랑 안에서, 유대적 전통의 모습인 성경을 암송할 때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