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는 초대교회만을 위한 은사인가? (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세 장을 할애하여 성령의 은사들과 은사 활용의 가장 큰 동기인 사랑에 대해 논한다.
그는 비록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전부 한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사랑 안에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전 12:4-7).
성령의 은사들 중 하나는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을 말한다’는 것은 신약에 등장하는 전문 용어인데, 이것은 학습을 통하여 습득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특수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은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고 영에서 시작한다(고전 14:1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언 말하기’가 엑스터시(ecstasy)적인 현상이거나 절제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일상적인 언어 사용과 마찬가지로 방언의 경우 말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더 감정적일 수도 있고, 덜 감정적일 수도 있다.
방언은 초대 교회에서 흔한 현상이었지만, 때로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방언에 대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갖도록 도와주었다.
방언에 대한 그의 교훈은 오늘날 방언을 둘러싸고 일부의 교회들에서 생기는 혼란을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인가? 성령 충만하면 반드시 방언을 말해야 하는가? 어떤 성경 해석자들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증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런 견해를 지지하기는 힘들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
성령의 감동과 능력에 의해서 행동하지만 방언을 말하지 않는 경우들은 많다.
사도행전의 경우들을 살펴보자.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으며(행 10:44-46), 에베소의 제자들도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셨을 때 방언을 말하고 예언했다(행 19:1-6).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방언을 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어쩌면 일부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고 대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그들의 일상적 모국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을 했을지도 모른다.
방언을 하는 것이 성령 충만을 보여주는 흔한 증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증거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기록된 경우들에서 성령 충만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구원을 받을 때 신자는 조용히 성령을 받았지만, 성령님이 신자의 사명 감당을 위해 능력으로 임하실 때에는 가시적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이 처음에 자신의 임재를 알리실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신 방법은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오순절에 신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종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행 2:1-13).
그 후 베드로의 설교 역시 성령의 감동에 의해 행하여졌다.
모든 신자들은 방언을 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예수님의 말씀과 “신령한 것(성령의 은사)을 사모하라”(고전 14:1)는 바울의 교훈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가 모든 성령의 은사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님이 신자들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들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 전체는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사용되도록 힘써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세 가지 은사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들이 실제에 있어서는 보편적인 은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암시한다(고전 14:5,13,31).
이 세 가지 은사들은 방언, 방언 통역 및 예언의 은사들이다.
만일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특정 은사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그 특정 은사들을 받기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 래리 크리스텐슨 Larry Christe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