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다르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어떤 철학적 사상을 받아들이고 믿는 데서 출발한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제거해도 불교는 존재하며, 유교에서 공자가 빠져도 유교는 건재하다.
왜냐하면 불교와 유교는 윤리 사상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서 모하메드를 제거해도 이슬람교는 살아남는데,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모하메드가 아닌 ‘알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진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분의 가르침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즉,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모든 것의 진정성은, 자신에 대한 그분의 주장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분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분의 가르침이 성립하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셔야 한다.
“왜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요? 당신은 어떻게 항상 기쁨의 생활을 하지요?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평안하게 만드나요? 절망적인 이 세상에서 당신 안에는 어떻게 그토록 희망이 넘쳐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교훈에 따라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내게 기쁨과 평안과 소망이 넘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그토록 갈등이 심했던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분의 주장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견해는 달랐다.
그분이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였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분이 누구이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질문에 대해 제자들이 전하는 대답은 그분을 실망시켰다.
그분은 다시 “그렇다면 너희의 생각은 어떠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믿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이 질문을 듣고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그분이 듣기를 원하셨던 대답이었다.
◈ 하나님의 은혜
당신이 얼음이 언 호수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얼음의 두께는 약 0.2센티미터이다.
당신이 얼음 위를 걸으면 얼음은 깨질 것이다.
얼음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널 수 있다고 당신이 굳게 믿는다고 해서 얼음이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면 얼음의 두께가 60센티미터인데, 당신에게 믿음이 아주 적다고 가정하자.
당신의 믿음은 적지만 얼음은 믿을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얼음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널 수 있다.
이 비유는 깊은 교훈을 가르쳐준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신 분이라면, 그리고 내가 그분을 주와 구주로 믿는다면 나는 구원 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된다.
나의 구원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이다.
예수님이 바로 나의 구원의 초석이시다.
신앙은 어떤 마술적 공식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 마치 마술사의 주술처럼 작용하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나는 내가 성경이 말하는 방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
나는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 구원을 얻었다.
즉, 나는 ‘은혜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구원 받았다.
나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것이 나의 구원의 기초이다.
그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나의 구원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호의’이다.
나의 믿음은 그분의 은혜를 받으려고 팔을 뻗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롬 3:22)라고 부른다.
◈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기에, 신앙은 그것의 대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구원의 문제에서 그 대상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
우리의 신앙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신앙의 본질은 믿음의 대상의 신실성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는 구원 받기에 충분한 믿음이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자기의 믿음이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행히, 당신에게 충분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그분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주라고 당신이 믿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실제 이룰 능력이 그분에게 있다고 당신이 믿느냐?’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이제 그분을 신뢰하라.
이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은 어떤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완전히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 그분은 맹목적인 신앙을 가르치지 않으셨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다(마 22:34-40).
그분은 “모든 지성적 판단을 중지하고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 3: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는 사실에 기초를 둔 종교이다.
이 점에서 다른 종교들과 완전히 구별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박고 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내가 나의 신앙에 대해 지적으로 더욱 많이 알수록 성령님은 내게 더 많은 믿음을 주신다.
◈ 맹목적 믿음은 아니다
내가 신앙에 관하여 100퍼센트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 할지라도 신앙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100퍼센트의 보장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우주에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변화들이 일어나고, 때때로 일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
아마도 수학의 세계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분야에서 100퍼센트의 확실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100퍼센트의 확실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전혀 연구해볼 필요조차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 강의할 때 때때로 어떤 학생들은 “선생님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저에게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내가 “증명할 수 없네”라고 대답하면, 그는 “역시 선생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는군요”라고 말한다(이때 그가 말하는 믿음은 ‘맹목적 믿음’을 가리킨다).
그러면 나는 “맞아.
믿음이야.
하지만 맹목적 믿음은 절대 아니지”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교수는 “잠깐만요.
선생님은 부활을 100퍼센트 증명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내가 “증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웃으면서 “역시 선생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는군요”라고 말한다(이때의 믿음도 ‘맹목적 믿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나는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하지만 맹목적 믿음은 절대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비행기를 조종하려고 할 때 나는 내 비행기가 절대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차피 알 수 없는 것! 무엇하러 비행기를 점검하겠는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 신앙의 소유자는 비행기를 점검하지 않고 즉시 비행기에 올라타 이륙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어리석음이다.
비행기를 이륙하기 전에 나는 압력, 연료 등을 확인한다.
비행기가 안전할 것이라고 99퍼센트 확신할 때 나는 비행기를 이륙시킨다.
믿음도 이와 같다.
나는 내가 왜 믿는지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를 보라.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 그분의 교훈과 부활을 보라.
성경의 증거들을 살펴보라.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
당신이 믿을 사람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
사도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말했다.
우리로 하여금 알고 믿도록 돕기 위하여 성령님은 성경적 증거와 역사적 증거를 모두 사용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고 믿는 신앙’이다.
내 머리가 거부하는 것을 내 마음이 기뻐할 수는 없다.
내가 믿기에, 하나님은 사랑할 수 있는 마음과 선택할 수 있는 의지와 알 수 있는 머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신앙을 가지려면 이 세 가지가 다 온전히 작용해야 한다.
- 조시 맥도웰,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