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한 가지 역사적 사건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살다 죽고 다시 부활하신 사건이다.
예배 중에 우리는 이 사건을 전하고 보여준다.
예배 중에 우리는 2,000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만든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념할 때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치유의 능력이 우리에게 전달된다.
모든 기념은 실제 사건에 뿌리박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생일 축하 파티를 연다고 가정해보자.
이 파티는 나의 출생이라는 실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출생이 없는 생일 파티는 무의미한 것이다.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은 내 출생 사건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생일 축하를 위해 우리는 케이크와 양초를 사용하며, 양초 한 개는 1년을 상징한다.
또한 친구들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음식을 먹는다.
이런 것들은 출생이라는 놀라운 사건을 ‘다시 창조하는 의미’를 갖는다.
예배는 이런 생일 축하 파티에 비유될 수 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출생, 삶, 죽음, 장사됨, 부활, 승천 곧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념한다(뿐만 아니라 그분의 재림을 대망하며 기리는 성격도 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다시 창조하면서,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의 사건에 동참했던 자들이 느꼈던 기쁨을 다시 느껴보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재창조를 더욱 완벽한 것으로 만들고 우리의 기쁨을 더욱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상징들을 사용한다.
모든 예배가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든 부분들을 기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기에 따라 그 사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강조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성탄절 때 우리는 주님의 탄생의 기쁨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부활절에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오순절에는 성령 강림을 강조하게 된다.
특별한 절기가 아닌 보통 때에는 그분의 교훈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는 세대에서 세대로, 세기에서 세기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록한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이 기록이 그분을 전하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본능은 행동적인 것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전달하고 전달 받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전하고 싶은 것을 말로써 표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행동으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사건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부분은 바로 이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 예배에 집중하며 반응하기
예배의 뿌리에는 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분의 재림을 통한 인류 역사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바로 이 이야기에 기초한다.
예배의 목적은 이 이야기를 말과 행동으로써 표현하고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는 인생으로 만든다.
예배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말과 행위로써 표현하고 전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자세로 예배에 임해야 하는가?
생일 파티의 비유를 다시 들어보자.
내가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 구석에 앉아 있다면 그 친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만일 내가 예배 중에 지겨워하면서 수동적으로 앉아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될 것이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분이 아니신가?
예배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향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루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분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연극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그분은 관중이시다.
우리는 설교자, 성경 낭독자 또는 특송을 부르는 사람이 배우이고 우리는 관중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관중이시고, 설교단에 선 사람들은 프롬프터(prompter. 배우에게 대사를 일러주는 사람)이며, 우리는 배우이다.
약 1년 전에 나는 어떤 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었다.
내 바로 뒤에 앉은 한 여인은 예배의 순서마다, 설교자의 말 한 마디마다 계속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아, 맞아요. 그렇죠. 예, 예, 아멘! 아멘!”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 나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예배에 집중하는 것이 약간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예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렇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가 내는 소리는 오히려 내가 예배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나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그녀처럼 ‘아멘’을 연발하며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예배 중에 ‘아멘’을 연발해야 할 것이다.
성경 낭독자가 성경을 읽을 때 집중해서 듣고, 성가대의 찬양에 집중하고,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설교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내어 “아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예배 시간에 예배 참석자가 개인적으로 혹은 모두 함께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우리는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며 반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배에는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있다.
예배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고 우리가 그 임재에 전심으로 반응한다면,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 평평한 땅
“십자가가 서 있는 땅은 평평하다”라는 금언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가 세워진 땅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땅은 평평하다.
대통령, 상원의원, 교사, 친구 등 그 누구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 평평한 땅에 서 있다.
그러므로 예배 참석자들은 모두 평등하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서로 연합되어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예배에 참석하기 때문에 서로 연합되어 있다.
어떤 예배 참석자가 다른 예배 참석자보다 더 높거나 낮지 않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없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차별이 없다.
예배 참석자는 모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