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받는 것’이라는 주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많은 오해들과 엇갈린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는가, 어떻게 받는가,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들이 엇갈린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언급하는 맥락은 서로 다르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어주시는 성령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한편, 누가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행 1: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았다.
그는 ‘성령을 받는 것’ 또는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것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한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그의 문맥에서 사용한 ‘받다’라는 말의 개념을 누가의 글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누가가 말하려고 하는 본래의 의미가 왜곡될 것이며, 그 결과 우리는 성령님이 누가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독특한 강조점을 놓치게 된다.
‘성령을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동일한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울의 기본적 시각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은사적 능력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2,5) 라고 묻는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님의 능력이 은사적으로 임하는 것을 경험했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이런 경험에 주목하라고 상기시키면서 “너희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너희의 신앙이 구원의 참신앙이라는 증거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은 은사적 성령의 임재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성령을 받는다”는 기본적 시각을 갖고 있다.
한편, 누가는 강조점을 조금 달리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성령을 받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그분을 더 잘 섬기도록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소간 자기도 모르게 성령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주 의도적이며 의식적으로 성령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극적인 나타나심을 체험하며,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 성령의 나타나심이 다소 차분하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방식은 상황이나 개인의 성격, 연령, 환경 및 교회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방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은 후에 어떻게 행하느냐이다.
결혼에 비유하여 설명해보자.
큰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도 있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르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결혼식을 치렀느냐가 그 후의 결혼 생활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 후에 어떻게 결혼 생활을 영위하느냐이다.
◈ 날마다 성령 충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누가의 메시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성령을 받는 것’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평생에 걸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날마다 필요하다.
어떤 경우들은 특히 성령 충만을 필요로 한다(행 4:31 ; 7:55).
성령 충만은 극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초자연적 표적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복음 증거와 복음 사역을 위한 새로운 영역을 열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성령의 열매의 조용한 성장으로 나타날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를 통제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30억의 사람들이 아직도 복음에 대해 듣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엄청난 선교적 도전 앞에 처한 오늘날의 교회 현실을 볼 때, 누가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성령을 받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에 관한 과거의 오해들을 바로잡고 복음 증거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신 것을 알고, 그분에 관해 완전히 정통적인 교리를 믿는다.
그러나 만일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지식과 믿음은 의미가 없다.
성령님의 사역의 결과, 내 안에는 두 가지 본질이 존재한다.
즉,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와 나의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 즉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계신 임재가 내게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권세를 갖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법, 즉 내 안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활성화시키는 법은 무엇인가?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성령님께 “예”라고 말씀드려야 한다.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날마다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할수록 그분은 더욱 우리를 위해 활동하신다.
그러면서 성령님을 날마다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은 내 안에서 더욱 더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는 저의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합니다.
저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의 삶과 저의 내적 생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하오니 주님이 저의 행동을 통하여 주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시옵소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활동하시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육신을 단호히 이기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자기의 잃어버린 권세를 되찾으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에게 그런 기회를 주면 안 된다.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가르친다.
바울은 “육체의 욕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욕심이 있다.
그러므로 육체의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육신에게 내 삶의 운전대를 내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에게 “너는 내 생활의 운전석에 앉을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육신적 욕구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육신에게 “노”(No)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 선택권을 드릴 수 있게 된다.
- 래리 크리스텐슨,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