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기도
신앙생활 FAQ

사랑은 감정 아닌가?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그것의 참의미를 오히려 놓치기 쉽다.
무엇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다.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을 담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은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내’와 같은 태도에 대해 말하거나,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은 행동에 대해 말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원하게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나의 아내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녀를 돌보아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녀를 돌보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만일 그녀가 피곤해한다면 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는 TV 뉴스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나의 모든 욕구를 희생하며 나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랑의 세 가지 형태 사랑은 세 가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첫 번째 형태는 구약의 아가서에서 묘사된 ‘낭만적’ 사랑 이다.
낭만적 사랑의 특징은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매우 열정적이다.
이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는 ‘에로스’이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허락하신다.
상호 독점적이면서 서로에게 충실하다면 이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이다.

두 번째 형태는 ‘상호적’ 사랑이다.
이것이 반드시 50대 50의 정확한 상호 분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주고받는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의 관계가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서로 깊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돌보아주었다.
또한 대부분의 부부간의 결혼생활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다.

세 번째 형태는 가장 고귀한 사랑인 ‘구속적’ 사랑이다.
이것은 낭만적 사랑이나 상호적 사랑의 수준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행복과 평안만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본질이 요한일서 3장 16절에 표현되어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일 우리가 이런 수준에서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 유익, 그리고 상처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상대방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고 할 것이다.

구속적 사랑은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기중심적인 낭만적 사랑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이면 최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가 아닌가?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마 5:43-48).
원수를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본능이고 감정이지만, 주님은 원수를 돌보고 그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치신다.
감정이 아닌 의지로 사랑한다 구속적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고 의지적 사랑이다.
자신의 감정에 따르는 사람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매우 힘들겠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사람은 그것이 쉬워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속적 사랑에서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구속적 사랑에서는 의지가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고, 감정은 그 결과로 따라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 우리의 연고자, 우리가 친구로 삼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가 마주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낯선 사람이거나 심지어 우리의 원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면 우리의 행동도 바뀔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가 사랑하기 가장 힘든 사람은 고의적으로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고통을 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정당하고 그 사람이 완전히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
구속적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척하거나 그의 잘못을 얼버무려 덮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그를 돕는 것이다.
원수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의지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위선은 아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예의를 갖추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힘입어 원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따뜻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척할 필요는 없다.
사랑의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순종에서 나온다.

“상대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서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우리의 주장이 위선적인 것이라고 누가 비판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라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의지적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돕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그를 한결같이 사랑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애정을 느낄 때가 올 것이다.

- 버논 그라운즈,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