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기도
신앙생활 FAQ

완벽주의 때문에 하나님이 멀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나는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없게 되고 하나님은 내게 진노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하나님을 아이들의 노래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와 같은 존재로 본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록을 만드시고, 그 목록을 두 번 확인하시며, 당신이 나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아신다.
그분이 마을에 오시기 때문에 당신은 착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죽음’을 말하는 신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내 속에서 늘 ‘그 정도로는 부족해!’라고 말하는 작은 음성입니다.” 완벽주의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다.

그분의 은혜는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다.
나는 결코 그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그분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할 수 없다.
내가 성취하고, 행동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그분이 나를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이 아주 멀게 보인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같은 분을 참고 견딜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화나게 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너무 가까이 오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분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 하더라도(행 17:28), 우리는 그분을 안전거리 밖에 세워둔다.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분은 또한 근접할 수 없는 분으로 보인다.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멀게 보이며 그래서 나는 그분께 다가가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실패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게 하며 그분이 훨씬 더 멀리 보이게 한다.
어떻게 이러한 불가능한 기대와 무거운 죄책감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유일한 해답은 은혜이다 첫째, 내가 두려워하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내가 만들어낸 그분의 이미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리는 하나님의 모습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나 공동체를 토대로 한 것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냉정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엄한 주인으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불쾌함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나 나의 양심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성경에서 나의 생각을 강화해주는 정죄와 죄책감과 심판에 관한 구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완벽주의자들은 이런 데는 놀라운 달란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거친 경고로 급하게 달려감으로써 사랑으로 가득한 모든 구절을 놓쳐버린다.
문제는 그 누구도 엄하고 받아들일 줄 모르는 하나님과는 결코 오랫동안 동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내쫓으려 하시거나 내가 그분을 내쫓으려 할 것이다.
나는 신경쇠약에 걸리거나 믿음에서 날 것이다.

둘째, 내 스스로 정한 기준이 하나님께서 내게 정하신 기준보다 높지 않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내가 완벽주의자들과 함께 일할 때, 이들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에 관해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완벽하세요.
그러므로 죄가 있는 우리는 그분을 편안하게 해드릴 수 없어요.”
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준보다 더 높은 기준을 스스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나를 안아 먼지를 털고 나의 발을 견고하게 세우기를 원하신다면 나로서는 그분이 그렇게 하시도록 기꺼이 허락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는 자녀로서 그분께 다가오라고 요구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가 없고 실수도 하지 않으며 살라고 요구하시는 게 아니다.

셋째, 심각한 완벽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친구일 수도 있고, 목사님일 수도 있고, 심리학자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그를 상담자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나의 정의로, 상담자는 성령의 일시적인 도움이 된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읽고, 옳은 것들을 생각하면 자신들의 염려가 눈 녹듯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완벽주의자가 정말 어려운 문제에 빠졌을 때, 말씀을 읽는 것은 그의 불행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것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읽는 모든 것이 “나는 이 기준에 이를 수 없어.
이건 내가 결코 할 수 있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은혜롭게 보이는 말씀이 그에게는 마치 자신을 정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고장 났다.
그의 수용 장치는 너무나 심하게 뒤틀리고 손상되어 있다.
그래서 밖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내주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어도 정작 그에게 닿을 때는 눈처럼 보이고 침묵처럼 들린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은 초기 성장단계의 잘못된 관계에 그 뿌리가 있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의 패턴들이 우리 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완벽주의자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신뢰와 무조건적 사랑으로)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상담자가 필요하다.
처음에 손상을 가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사람들만이 이러한 손상을 되돌릴 수 있다.
오래된 완벽주의의 습관을 극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완벽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
은혜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은혜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이러한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허락할 수 있을 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 데이빗 씨맨즈,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