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기도
신앙생활 FAQ

그리스도인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게 정상인가? ②

◈ 스트레스는 삶의 일부
근심이나 스트레스에 직면하는 것은 인간 상태의 일부, 곧 우리가 타락했다는 사실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살아가다보면 모든 게 확실한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행사하는 것보다 큰 통제력을 갖고 싶어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스트레스를 느끼는 게 정상인가?”라는 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스트레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스트레스는 삶의 일부이다.
스트레스는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긴장이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창조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까지 쌓일 수 있으며, 마침내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인간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스트레스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결정된다.
스트레스는 생리학적인 동시에 심리학적인 반응이다.
어떤 상황이 주어진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우리가 그 상황에 반응하기 위해 하는 준비이다.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모든 자원이 결정을 위해 한 지점으로 모이게 만든다.

고대인들은 야생 동물을 만날 때 스트레스에 직면했다.
이들이 동물(스트레스를 주는 것)을 보는 순간 이들의 아드레날린 분비샘이 활성화되었으며 이들은 싸울 것인지 아니면 피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이들의 몸과 마음은 어느 한쪽의 행동을 위해 준비했다.
오늘날 우리는 야생 동물과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과 동일한 “싸울 것이냐 아니면 피할 것이냐”의 반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에 직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옛날의 사냥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옛날 사람들만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장이 토요일 오후 늦게 당신이 일하는 사무실에 들어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존스 씨, 월요일 아침 8시 30분까지 재정 보고서를 완성해놓으세요.”
당신은 가족과 함께하는 멋진 주말 계획을 세워놓았고 주일 아침에는 교회에서 중요한 모임이 있다.
회사일은 당신에게 정말이지 너무나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승진을 바라기 때문에 사장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한다.
누구나 위험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싸울 것이냐 아니면 피할 것이냐”라는 선택에 직면한다.
당신과 나는 옛날의 사냥꾼들보다 더 신중하게 선택한다.
우리의 본능은 사장과 싸우고 싶고, 얼굴이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싸움에 따르는 위험이 두렵기 때문이다.
존스는 땀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얼굴이 상기되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턱을 당기고, 등을 꼿꼿이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알겠습니다.”

존스는 스트레스를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쯤 그의 위장은 분노로 들끓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해심이 있고 사려 깊은 아내에게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문을 연다.
그러나 아내는 그를 맞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 트레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그는 집에 돌아온 지 3분도 채 못 되어 그의 딸 트레시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열 바늘을 꿰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들 드류가 이웃집 아이와 싸웠으니 이제 곧 그 아이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올 게 분명했다.
존스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목사님이었다.
그는 존스에게 내일 아침에 교회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참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존스는 마땅히 참석해야 한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하면 가족과 회사일을 위한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라고 대답한다.

지금쯤 존스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통제 불능 상태이며, 그는 자신의 몸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존 트롭, 기독교 교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