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곽상학의 말과 말씀

[곽상학의 말과 말씀] 왕의 캘리그라피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구직을 준비하는 취준생에게 곤혹(困惑)스러운 통과의례(通過儀禮, Les Rites de Passa)가 하나 있으니 바로 면접고사(面接考查)이다. 면접 위원과 마주 앉아 시종일관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표정은 물론이고 적절하고도 유창한 화법을 구사하여 자신만의 뚜렷한 소신과 전문성을 드러내야 하는 이 진땀나는 시험은 누구나 피해 돌아가고 싶은 힘든 관문(關門)임에 분명하다.

중국 당(唐)나라 때도 관리를 등용할 때, 중요한 면접 과목으로 몸, 말씨, 글씨, 판단력이라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인재(人才)를 얻었다고 한다. 신(身)이란 사람의 풍채와 용모로서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느끼는 첫인상이다.

언(言)이란 사람의 언변을 이르는 말로서 자신의 뜻(志)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합당한 언어구사력을 말한다. 서(書)는 필적(筆跡)을 이르는 말로서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와 인생 발자취를 대변한다 하여 예로부터 매우 중요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판(判)이란 사람의 문리(文理), 곧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냉철한 판단력을 뜻하는 말이다.

바야흐로 정보화 사회가 도래(到來)하면서 지금의 면접고사와 당나라의 신언서판의 교집합에서 벗어난 유일한 항목을 하나 찾자면 바로 ‘글씨’일 것이다. ‘판서(板書)와 필기(筆記)’에서 벗어나 ‘토론(討論)과 발표(發表)’로 전환되고 있는 학교 수업과 컴퓨터 인쇄 문서가 일반화된 정보화 사회에서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손글씨는 급속도로 하향평준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형국(形局)에 제 멋대로 쓰여진 글씨를 보며 “도대체 무슨 글씨가 이 모양이니? 개발새발이로구나.”라며 젊은이를 핀잔주는 것은 어쩌면 꼰대를 자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2011년부터 복수 표준어로 인정된 ‘개발새발’의 원형은 ‘괴발개발’인데, ‘괴발개발’은 ‘고양이의 발과 개의 발’이라는 뜻으로 되는대로 마구 갈겨 놓은 글씨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고양이 발이든 개 발이든 새 발이든 그들의 족적(足跡)이 사람의 손가락에 필적(匹敵)할만한 필적(筆跡)은 아닐 터, 동물의 발재간이 곧잘 사람의 손재간에 비유(比喩)되는 건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동물의 발이 사람의 손을 능가할 수도 없겠지만 사람의 손이 동물의 발 구실을 하는 것도 보통 치욕(恥辱)이 아닐 게다.

그 치욕의 주인공은 바로 신 바벨론 제국의 2대 왕인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이다. 왕자 시절부터 바벨론의 창설자인 부왕(父王) 나보폴라살을 도와 당대 최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켜 앗수르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갈그미스(Carchemish) 전투에서 이집트를 격퇴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근동 패권을 거머쥔 입지전적(立志傳的)의 인물이 바로 그였다.

B.C. 605년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은 남진 정책을 펴 남유다의 왕인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을 차례로 포로로 끌고 갔다. 이 때 제1차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그 유명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다. 그들은 비록 바벨론의 교육을 받고 바벨론의 음식을 먹어야 했지만 오직 하나님께만 뜻을 정한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학문의 지식과 지혜의 명철을 얻은 다니엘은 쾌도난마(快刀亂麻)같은 해석력과 예지력으로 전 세계의 역사적 흐름과 느부갓네살의 꿈이 가져올 비참한 최후까지도 거침없이 예언했다.

다니엘의 예언은 어느 날 바벨론 왕궁의 옥상을 거닐던 느부갓네살의 본심이 드러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세운 이 성(城) 바벨론은 위대하지 않은가? 나는 내 큰 힘과 권력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위해 이 도시를 건설했다.” 모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다 취(取)해버린 한 나라의 왕 느부갓네살은 그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驕慢)으로 인해 곧바로 하늘의 왕으로부터 운명의 최후통첩(最後通牒)을 받게 된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선언한다. 이 나라의 왕의 자리는 네게서 떠났다. 너는 사람들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마침내 느부갓네살은 사람들에게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그 몸은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독수리 깃털같은 머리털과 새 발톱 같은 손톱으로 들짐승처럼 치욕의 7년을 보내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의 대를 이은 벨사살(Belshazzar)왕은 선대의 교만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신하들 1,000명을 위해 벌인 큰 술판에서 왕비와 후궁들, 귀족들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 온 금 그릇과 은 그릇을 가져오게 해 금, 은, 쇠, 청동,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왕궁 촛대 맞은편 석고로 된 흰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햄스트링(hamstring)은 뻐근해져 오고 오금은 저려온다. 간신히 지탱한 몸은 이미 잔뜩 굳어 버렸고 겁에 질린 채 흰 벽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왕 벨사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Mene Mene Tekel Upharsin)” 단 한 글자도 해석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바벨론의 지혜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다니엘은 거침없이 그 글씨를 해석해 내려갔다. “벨사살이여, 왕은 느부갓네살의 아들로서 그의 교만의 결과를 다 알면서도 마음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은 하늘의 주인을 거역하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왕 앞에 가져오게 해 왕과 귀족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셨습니다. 왕은 또한 은, 금, 청동,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 곧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왕의 생명을 손에 쥐고 왕의 모든 갈 길을 이끄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단5:22~23)

‘세었다, 세었다, 달아보았다, 나누었다’ 벨사살이 즐기던 궁중 연회에서 벽에 나타난 사람의 손가락은 경고를 넘어 심판의 메시지를 써내려갔다. 아람어로 쓰여진 그 글은 “세고 세었으며 무게를 달고 나누었다.”는 뜻으로 메대 바사 제국에 의해 바벨론이 멸망함과 동시에 벨사살 왕이 하나님께 심판받을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날 밤 바벨론은 메대-바사 군대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으니 이 예언이 성취된 해는 BC.539년이다.

정보 처리된 컴퓨터 서체는 깔끔하고 세련되었지만 경직되고 정형화되었다. 최근들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유연하고 동적인 선, 글자 자체의 독특한 번짐, 살짝 스쳐가는 효과, 여백의 균형미 등 순수 조형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손글씨인 캘리그라피(Calligraphy)가 현대인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제국(帝國)의 왕은 손글씨에 주목했어야 했다. 성경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누가 왕이냐?’이다. 오늘날 성경이 계속 내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네 인생의 왕이 누구냐?’

왕되신 주의 옷자락을 만지는 인생, 왕되신 주의 발에 입 맞추는 인생으로 방향을 정할 때, 비로소 내가 썼던 나의 왕관(王冠)을 내려놓을 수 있다.

교만과 겸손의 기로(岐路)에서 정확한 선택과 뚜렷한 집중으로 인생이 빛나기 시작한다. 내 인생의 왕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분을 주목하는 것이 가장 복(福)됨을 역사는 지금도 힘주어 써내려가고 있다. 만유(萬有)의 왕이신 하나님은 지금도 유연하고도 동적인 손글씨를 내 마음판에 써내려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를) 그만 섬기고, (오직) 그만 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