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파괴된 데스티니 이야기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서 시작된다. 죄는 두 종류의 두려움을 낳는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인 '아담의 두려움'이고, 둘째는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인 '가인의 두려움'이다.
죄가 가져오는 두 번째 종류의 두려움인 '가인의 두려움'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다. 에덴에서 쫓겨나며 가인이 이야기한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가인의 두려움은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것들, 다른 사람과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다. “집에 강도가 들어오면 어쩌지?”, “우리 아이가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이지는 않을까?”,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는데, 우리 동네에도 지진이 오는 건 아닐까?”, “북한 핵은 괜찮을까?”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 또는 환경 등 내가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가인의 두려움이다.
몇 년 전 신문에 보도되었던 사건이다. 한 30대 회사원이 고아 남매를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다. 자기 돈 삼백만 원을 들여 이들에게 방도 얻어줬다. 참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들이 고아 남매가 아니라 가출한 청소년들이었다.
끔찍하게도 이들은 자신을 도와준 회사원을 죽이고 돈을 빼앗을 계획을 세운다. 어떻게 죽일 것이며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도 살인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돈만 빼앗아서 달아났다.
무서운 세상이다. 직장인의 85퍼센트가 묻지마 범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4명 중 1명이 귀가 시간을 앞당겼다는 보고도 있다. 강남역 사건, 오원춘 사건이 나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나만 착하게 산다고 될 일이 아니다. ‘가인의 두려움’은 내 노력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인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성을 쌓았다(창 4:17).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담을 높게 쌓았다. 이제 조금 안심이 된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외롭다! 인생의 담을 높이 쌓고 아무도 내 삶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두려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외로움이라는 복병이 기다린다.
삶에는 친구가 필요하다.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주며,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고 슬플 때 함께 슬퍼해줄 친구 말이다. 부족한 모습이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성문을 열고 친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러자니 두렵다. 다시 성문을 닫는다. 외로움은 두려움의 파생 상품이다.
이 모순은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 하나님을 떠난 것에서 왔다. 오늘날 우리가 앓고 있는 두려움과 외로움의 병은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결과다. 선악과 후유증이다.
가인의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믿음이다.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 4:15
그런데 가인은 이 표를 받고도 여전히 두려웠다. 표를 받고 나서도 성을 쌓았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없었다.
‘과연 하나님의 이 보증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벨을 죽였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할까? 못 믿겠다. 스스로 나를 지켜야지!’ 성을 쌓는다.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가인의 두려움’은 믿음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이며, 내 인생에 최선의 것만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나를 받아주고 용납해주시는 분이다. 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아담은 두려움을 몰랐다. 외로움도 몰랐다. 그에게는 오직 평안만이 있었다. 그리고 데스티니는 이 평안 속에서만 제자리를 찾는다.
죄가 데스티니를 망가뜨리는 메커니즘은 평안을 파괴하는 것이다. 죄는 두려움이라는 폭풍을 일으킨다. 두려움의 태풍은 데스티니 호를 이리저리 휘둘러 항로를 벗어나게 한다. 죄가 데스티니를 파괴한 것이다. 당신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평안인가?
예수님은 다음 말씀으로 당신을 초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 14:27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로, 하나님께로 나오라. 평안을 주신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평안을 주신다. 두려움을 바꿔 평안으로, 태초에 아담이 누렸던 그 완벽한 평안으로 바꿔주신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며 잠든 아기의 평안한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어떤 두려움도, 어떤 불안도 없는 아기의 완전한 평안!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은 이런 것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정말로 이 평안을 누렸다. 베드로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가운데서도 편안히 누워 잠들었으며, 스데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다 못해 신비했다. 제자들에게는 정말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신비한 평안이 있었다. 그리고 이 평안 속에 그들의 데스티니는 무사히 항구에 이르렀다!
당신도 이런 평안을 누리고 싶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낯을 하나님께로 돌리라.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라. 두려움을 내쫓는 그분의 음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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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과 기도로, 늘 주님과 동행함으로
두려움을 내쫓는 것은 높은 성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만이 우리를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건져낼 수 있다. 두려움과 싸우려고 높은 담을 쌓고 있다면, 멈추라. 당신의 데스티니는 외로움 속에 또 다른 곳으로 표류하게 될 것이다. 두려움과 외로움을 평안으로 바꾸는 것은 온전한 사랑뿐이다.
† 말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 시편 4편 8절
† 기도
하나님, 저에게도 가인과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위험들이 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덮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두려움을 떨쳐내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겠습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내 인생에 최선의 것을 주시는 주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함께하여 주옵소서.
† 적용과 결단
고난 가운데도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한 다윗(시 4:8). 그가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함께하는 분이 누구신지, 자신의 운명을 쥐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안 속에서 당신과 함께하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낭독으로 만나는 테마
귀로 들어요~ 갓피플 테마. 눈으로만 읽는 것과는 다른 은혜가 뿜뿜. 테마에 담긴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양하고 새롭게 나누어지기를 기도하며, 갓피플 직원들이 직접 낭독했습니다. 어설퍼도 마음만은 진실한 낭독러랍니다^^ 같은 은혜가 나누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