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국 찬송가책에서 <‘Ah, Holy Jesus,’ Johann Heermann 사, 1630>라는 곡의 가사를 보고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Twas I, Lord Jesus, I it was denied you, I crucified you.”
바로 저였어요 예수님, 당신을 부인한 사람, 내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feature=youtu.be
왜 그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에 한결같은 자기 연민으로 벌레만도 못한 나, 쓸모없는, 연약한 나를 생각하는 것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지만, 정작 그 주님을 부인한 것이 옛날 그 사람들이 아닌 나라는 사실에 대한 생각은 깊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 안의 복음은 처음부터 참 오랫동안 나를 어떤 상황/환경/느낌에서 구원해 줄 이야기 정도로 머물렀을 뿐, 진짜 나라는 사람의 실체를 하나님 앞에서 마주한 것은 신앙생활의 연차 수가 꽤 오래 되도록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찬송가 가사를 마주했을 때에, 그러한 저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만나주셨던 주님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어쩌면 그러한 자신을 잊기 위해 다시 생업에 열중하려 하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시는 분.
제자들에게 있어 부활의 주님이시지만, 자신이 배신했던 스승이 차려주시는 식탁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황송함과 부끄러움, 난처함으로 뒤죽박죽이던 베드로를 향해 물으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그의 과거와 현재를 철저하게 마주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게 한 자, 그리고 오늘 또다시 그의 사랑 앞에 서 있는 자.
예수님을 못 박게 한 자, 다시 그 사랑 앞에 서다
너무나 큰 아이러니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고도, 사랑받을 수 있다니요! 그러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반복되는 질문은 베드로의 처절한 현실과 주님의 철저한 사랑을 동시에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했지만, 분명 그의 수준으로 따르며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낱 두려움에 패배한 베드로의 수준 낮은 사랑도 다시 거두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물론,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단지 베드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늘 적당하게 괜찮은 척, 예수님과 가까운 척하려 애를 쓰지만, 아주 조그마한 두려움만 찾아와도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듯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실존을 부인해버리는 사람.
그럼에도 주님을 마주하는 그 깊은 지점을 마주하지 않을 때에는 사역이라 이름 붙은 수많은 ‘하나님의 일’ 뒤에 숨어 다른 이들의 삶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마음을 지니는 사람. 이러한 오늘의 저에게는 늘 베드로와 같은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박았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일, 모든 약속을 다 잊고,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았네.
하지만 자기 연민과 같은 신세한탄으로 이 복음의 이야기를 마칠 수 없어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2절 가사를 더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길어진 이야기는 배신한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신 그 주님의 마음입니다.
참 사랑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하나님 당신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그 부활의 걸음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다시 바라봅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사랑합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랑, 아버지께 인도하시네
내가 예수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뒤통수나 치는 사랑을 여전히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의 시선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것은 이 땅을 살면서 그 사랑의 모양을 경험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신 분, 이 땅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소망을 두고 오늘도 고백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