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죄를 보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항상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사기를 치고, 못살게 구는 나쁜 사람들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난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다. 내가 무슨 죄인이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기준을 사람의 윤리로 잡으면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나 무서운 죄인이다.
실내 공기가 깨끗해 보여도 불을 끄고 플래시를 비추면 수많은 먼지들이 보인다. 겉으로는 교양이 있는 척 위장하고 있어도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음란과 폭력과 욕심과 미움과 질투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샅샅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섰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버틸 수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를 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말씀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찌르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실체를 보게 된다. 그러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모르게 된다. 그야말로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게 된다. 이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구원은 회개에서부터 시작한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다. 회개 없는 성령의 임재도 없다. 뼈를 깎는 절절한 회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거쳐서 예수님의 보혈로 씻겨진 심령에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강요에 의한 회개가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 칼날 같은 말씀이 그 심령을 찔러서 통회 자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잘못만 깨달으면 자신의 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룟 유다처럼 자살해버릴 수밖에 없다. 회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
회개란 면목 없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회개의 결론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집을 나갔다가 망해버린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회개는 슬프거나 미안한 감정, 그 이상의 것이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죄로부터 돌아서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실질적 결단이 이뤄지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지었던 베드로, 주님을 판 가룟 유다의 죄와 주님을 부인한 그의 죄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께로 돌아왔고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성령의 시대에 새로운 지도자로 쓰임 받게 되었다.
베드로와 유다를 다르게 만든 것은 회개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고 “너희가 회개하고”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이 솟구쳤을 것이다. 아마 속으로 하고 싶은 메시지는 “나 같은 죄인도 회개하고 이렇게 쓰임을 받으니 여러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였을 것이다.
- 에스겔 18장 30~32절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로마서 3장 23,2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