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곽상학의 말과 말씀

[곽상학의 말과 말씀] 욥(Job), 극한 직업(job)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Your beginnings will seem humble, so prosperous will your future be) 욥기 8장 7절에 나오는 이 말씀은 주로 식당이나 사업장 같은 곳에서 멋진 액자에 담겨 눈에 잘 띄는 곳에 걸려 있는 단골 성구(聖句)이다.

축복과 번영이라면 본문 안에서 그 구절이 무슨 뜻이건 간에 상관없이 성경 말씀 한 두 구절 잘라서 축복의 말씀으로 가훈화(家訓化)하기 일쑤이다. 이 말씀 또한 성경에 대한 무지를 넘는 동시에 축복에 대한 열망에 기인한 지독한 아전인수(我田引水)이자, 애꿎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이다.

가을철에 털갈이하여 새로 돋아난 짐승의 가는 털만큼이나 공연히 생트집을 잡아 몽니부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秋毫)도 없다. 다만 ‘은혜롭지만 틀린 적용’을 하는 이 축복이 남용되는 시대 앞에서 경각심(警覺心)을 가져보자는 충정(忠情)이랄까.

성경에서 가장 오래전에 쓰여진 책인 욥기의 가장 큰 주제는 ‘성도에게 허락하신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천상어전(天上御殿)에서 벌어진 회의 석상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자랑하신다. “내 종 욥을 유심히 살펴보았느냐? 땅 위에 그런 사람이 없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한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음흉한데다 심술궂은 몽니쟁이 사탄은 하나님의 믿음이 틀렸다고 강변한다. “욥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 집안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의 사면에 울타리를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주께서 욥이 손대는 일에 복을 주셔서 그 가축이 땅에서 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손을 뻗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분명 주의 얼굴에 대고 저주할 것입니다.”

사실 욥기 전체가 욥과 친구들의 동방 문학적 성격의 순화논법을 가진 긴 담화(談話)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매우 지루한데다가 간명(簡明)하지 않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네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전능하신 분께 은총을 구한다면 또 자네가 순결하고 정직하다면 지금이라도 그분께서 자네를 위해 직접 일어나 자네의 의의 자리를 회복시킬 것이네.”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의 이 충고는 어쩌면 오늘날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권면이자 충고처럼 들린다. 빌닷의 이 충고의 방점을 찍는 충고가 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이다.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에게 고난이 왔으니 반드시 그 앞에는 뭔가 어떤 원인이 있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시종일관 욥을 공격했다. 그들의 사고방식 안에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은 없었던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 즉, ‘고난이 왔다면 반드시 그 앞에 어떤 전제가 있어야만 하는 하나님’으로 제한한 그들은 하나님께 받을 것이라곤 책망(責望)밖에 없었다.

1작과 2작이 나란히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신(神)과 함께’는 작품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근간(根幹) 사상이 ‘인과율(因果律, Causality)’이다. '인과'(因果) 또는 '인과성'(因果性)이라고도 하는 인과율은 어떤 상태(원인)에서 다른 상태(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의 법칙성을 일컫는다.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 자체가 사회적 실천과정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세계의 모든 현상이 인과적으로 제약당하고 있다는 명제이다.

문학 양식상 시가서에 해당하는 욥기는 ‘어찌하여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하는가?’, ‘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과연 하나님은 의로우신가?’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고대 세계의 보편적 세계관인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며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오직 그분 앞에 감사와 찬양을 돌릴 것 밖에 없다.

소위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3요소는 건강한 육신, 풍요로운 물질, 사랑하는 가족이다. 이 행복의 조건들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잃어버린 욥은 비로소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하나님’이라는 굴레 안에 가둬버린 친구들과는 달리 욥은 자신에게 왜 그 엄청난 고통을 쏘시고 힘든 역경을 겪게 하시는지 이유를 몰라 답답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고 만유를 주재(主宰)하시는 하나님을 인생의 주권자(主權者)로 인정한다.

구복원수(口腹怨讐)란 말이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捕盜廳)이란 뜻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극한 직업도 마다하지 않고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이겨낸다는 말이다. 구직난으로 속 끓이는 많은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직장인들과 자영업자들은 오늘도 ‘구복원수’를 떠올리며 그 자리를 견뎌내고 있다.

분명 소명(召命) 의식으로 시작한 직업(vocation)이었건만,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Job)으로 전락한 씁쓸한 직업인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직업은 나와 하나님, 나와 가족, 나와 너가 만나는 위대한 인생의 무대이다.

비록 내 입과 목구멍을 채우기에 급급해 보일지 몰라도 그 직업을 통해 나의 사명(使命)은 그 빛을 드러낼 것이다. 비참한 인생 바닥에서도 욥은 끝까지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욥이 자신의 온전한 인생 사명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 주관자가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단코 자네들이 옳다고 말하지 않겠네. 내가 죽을 때까지 나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겠네.” (욥27:5)

매일 크고 작은 영적 전쟁에서 사탄의 세력과 싸움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讒訴)하는 불구대천(不俱戴天),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 사탄에게 이렇게 선포해야 한다.

“나는 나를 지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기쁨 가운데 그분의 영광 앞에 흠 없이 서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우리 구주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능력과 권세가 만세 전부터 그리고 지금과 영원무궁토록 있음을 믿는다.” (유1:25)

신앙은 의외로 간단할 때가 있다. 먼저 숨가뿐 나의 호흡을 버리고 넉넉한 주님의 호흡을 찾는 것이다. “죽겠다. 죽겠다.” 푸념으로 일관한 나의 가뿐 호흡을 주님의 넉넉한 호흡으로 길게 늘여보자. “주께 있다. 주께 있다.” 신앙은 때때로 뒤집어 생각해 봐야 한다.

내게 찾아온 ‘역경’을 살짝 뒤집어 보자. 반드시 나를 성장케 하는 인생 자양분 ‘경력(career)’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 힘들다. 내 힘들다.”라고 하며 눈물짓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축 처진 어깨를 다독이며 해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다들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