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葉書), 정말 나뭇잎 한 장만한 종이에다 글과 그림을 꽉꽉 채워 좋아하는 방송국 DJ에게 줄기차게 날려 보냈던 그리운 그 시절, 이젠 손 편지를 썼던 기억도 받았던 기억도 꽤 가물가물하다.
며칠 전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군복무 시절에 아내와 주고받았던 손 편지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편지가 아내로부터 받은 편지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내무반 침상 관물대 앞에서 잔뜩 웅크리고 글 쓰는 절박한 이등병을 생각하니 객쩍은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율곡집(栗谷集)을 보면 율곡(栗谷)이 주고받은 편지가 기록되어 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보낸 편지까지 가지고 있다니 확실히 그는 범인(凡人)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도 친구를 향한 애틋한 우정은 우리와 다름없었나보다.
율곡집에는 벗 우계 성혼에게 쓴 편지글도 기록되어 있는데 “호원족하(浩原足下), 전 일에 보내준 글을 받았는데...” 호원이란 율곡의 절친했던 벗 우계 성혼의 자(字)이다. 자는 상대방을 호칭하는 또 다른 이름인데 율곡은 우계를 호원이라 부르고 우계는 율곡을 숙헌(叔獻)이라 불렀다. 본명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라고 쳐도 족하라니. 그렇다. 족하(足下)는 동년배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부를 때 쓰며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어이다.
중국 춘추시대 진문공(晉文公)이 간신에 휘둘리자 충신 개자추(介子推)는 면산(緜山)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중에 진문공은 그를 그 산에서 나오도록 하기 위해 불을 질렀으나 끝내 버드나무를 끌어안고 타죽은 개자추를 발견한다.
“슬프다. 족하야. (悲乎足下)” 그 버드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 탄식한 진문공은 개자추가 생각날 때마다 나막신을 굽어보며 자신의 인물됨이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면서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지는데 후에 이 ‘족하(足下)’란 말이 경칭(敬稱)으로 쓰이다가 오늘 날에는 형제자매의 자녀를 일컫는 ‘조카’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황제(皇帝)는 폐하(陛下)다. 웅장한 대궐의 섬돌(陛:섬돌 폐) 아래에서나 멀리서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임금님은 전하(殿下)이다. 역시 경복궁 근정전 전각(殿閣) 아래에서나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카는 족하(足下)이다. ‘발 아래’ 라는 뜻이니 얼마나 가까운 사이겠는가.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 쓰는 품위 있는 말로 자녀나 다름없는 가까운 혈육의 존칭(尊稱)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는 자녀나 진배없는 조카가 한 명 있었다. 형님 하란(Haran)이 남기고 간 외동아들 롯(Lot)이 그 주인공이다. 롯은 삼촌인 아브람(Abram), 할아버지 데라(Terah)와 함께 가나안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아브람이 75세였을 때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란이라는 땅을 떠났다. 믿음의 조상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혹시 성경에 로또(lotto) 복권이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창세기 12장 4절을 발음 되는대로 크게 읽어보자.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떠났습니다. 롯도[로또] 아브람과 함께 갔습니다.”
과연 아브람과 함께 간 이 조카가 로또 복권이었을까?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에서부터 삼촌과 함께 가나안 이주에 성공한 롯은 나중에 가축이 너무 많아져서 삼촌과 함께 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말 로또의 인생인 듯 보였다. 롯은 삼촌과 헤어져 초장이 넉넉하고 비옥한 사해 연안 도시 소돔 근처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곧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사해 연맹국들 사이에 발생한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고, 삼촌 아브람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롯의 인생 하이라이트는 바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에서였다. 그 도시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 속에서 믿음이 없고 우유부단한 아내를 잃고 극적으로 구원받는 등 롯의 인생은 희비(喜悲)의 쌍곡선을 그리는 롤러코스터 인생이었다.
롯의 생애는 한마디로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고, 죄악 된 이 세상이 한 개인과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거울처럼 보여주는 영적인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기쁨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정확한 거울이며, 신기루(蜃氣樓)같은 로또 행복을 좇으며 사는 인생의 최후가 비탄(悲嘆)임을 미리 가르쳐주는 선생님이었다.
조카 롯은 아브람에게 더 이상 로또가 아니었다. 75세에 부름 받은 아브람은 사실 99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지 못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온 마음으로 순종하며 깨끗하게 행하여라.”(창17:1)
하나님의 수태고지에 비웃음으로 일관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품에 안은 10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을 향해 진정한 믿음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이삭은 토스트 브랜드가 아니라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이삭은 99세까지 아브람(Abram, 높은 아버지)으로 살던 인생을, 아브라함(Abraham, 열국의 아비)이라는 인생으로 시작케 한 믿음의 분기점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조카가 족하(足下)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십분 동의할 것이다. 조카 롯을 통해 아브라함은 우리의 인생이 누군가의 ‘발 아래(足下)’에 납작 엎드릴 때에 진짜 인생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생 한 방’이니, ‘대박 인생’이니 하는 허탄한 로또 신화에 뜻을 두지 않고 전능하신 분의 ‘발 아래(足下)’ 인생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비단 우리의 인생뿐이랴. 모든 만물은 마땅히 그 발 아래에 엎드려야 한다. 그 분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니 우리의 입술엔 어찌 자족(自足)하는 감사가 넘치지 않을 수 있으랴.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1:22)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눅1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