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절기별 묵상

고난의 이유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 벧전2:24

우리는 빚이나 모욕이나 상해를 용서해줄 때 화해 명목으로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가를 요구한다면 용서와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잃은 것을 배상받는다면 용서를 운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받아야 할 몫만 받으면 그만입니다.

용서는 은혜를 전제로 합니다. 남에게 상해를 입었더라도 은혜를 베풀어 그냥 돌려보냅니다. 굳이 소송을 하지 않습니다. 용서해줍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줍니다. 그래서 영어의 ‘용서’(forgiveness)라는 말에 ‘주다’(give)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0장 43절).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에게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친히 그렇게 증언해놓으셨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이사야서 43장 25절).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옮기셨으며”(시편 103편 12절).

그러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인생 경험을 통해서 용서로 충분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살인이나 강간처럼 죄로 인한 상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만약 판사(혹은 하나님)가 살인범과 강간범에게 “뉘우치는가? 그럼 됐다. 뉘우쳤으므로 용서한다”라고 말하고 그것으로 재판을 종결짓는다면 그 사회든 세상이든 존립하지 못합니다. 설령 피해자가 용서를 원할지라도 이런 사건에 대해서 국가는 공의(정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죄가 다 심각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모독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당합니다. 범죄자들이 사회에 입힌 해악을 모두 말소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공의도 범죄한 우리를 그냥 방면하는 것을 용납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입힌 손상을 반드시 갚도록 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공의 안에서 더욱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모독한 범죄자들이 풀려나 용서를 받는다면, 그들을 그렇게 방면해줄지라도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을 수 있는 극단적인 조치가 따라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에베소서 1장 7절). 용서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 드리는 순종은 용서의 열매이지 뿌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의롭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신다는 소식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도록 피 흘리신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