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14. 3세기의 기독론 논쟁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의 박해: 교회와 국가가 충돌한 제-라운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이후 한동안 뜸했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치세 때 다시 재개되었지만, 이때의 박해는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고 어떤 점에서는 교회에 긍정적인 유익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당시의 박해로 인해 로마 감독이던 폰티아누스와 로마 교회 내의 반체제 그룹 지도자인 힙폴리투스는 사르데냐 섬에 있는 광산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이 때 두 사람은 죽기 전에 오랜 반목과 갈등을 뒤로한 채 화해했고, 이후 힙폴리투스는 로마에 있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이 분리되어 나왔던 로마 교회로 돌아가 화합하도록 조치를 취한 후 귀향지에서 죽었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교회와 국가가 충돌한 제-라운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잔혹했던 박해가 지난 후 교회는 거의 반세기 동안 평화를 누렸다. 중간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재위기에 박해가 재개되긴 했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고 찻잔 속의 태풍처럼 지나갔을 뿐이다.

확인되지 않은 전승에 의하면, 최초의 아랍인 출신 황제인 필리푸스는 기독교 신자였다고 한다. 이 평화의 반세기를 지나며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매일 상류층 귀족들의 개종이 줄을 이었고, 일반인들도 더 이상 2세기에 풍미했던 기독교 신자에 대한 미신적인 비난을 믿지 않았다. 이즈음 기독교는 도덕적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 안의 뜨거운 사랑의 교제로 인해 이교도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교회가 누린 평화의 반세기도 데키우스 황제가 즉위하는 3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끝나게 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북쪽 국경에서 봇물처럼 밀려드는 고트족의 침입과 동쪽 국경에서 새로 창건된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으로 인해 동시다발적인 위기에 처해 있었다. 데키우스는 주전 1세기를 살았던 천재적 지도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흠모하는 전형적인 로마인이었다.

그는 3세기에 로마가 당하고 있는 위기의 근원을 로마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 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런 판단 하에 그는 로마의 옛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의 전통 신들에 대한 제사를 강화하는 정책을 밀어부쳤다.

250년, 데키우스는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드린 후 이 의무를 마쳤다는 ‘증명서’를 발급받으라는 칙령을 제국 전역에 발표했다.

데키우스의 칙령은 기독교 신자들을 색출해 죽이는 게 아니라 로마의 전통 신앙으로의 회복과 숭배를 제도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박해로 인한 순교자는 극히 미미했다.

로마 당국자들은 제사를 거부하는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해 각종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고문을 통해 신앙을 부인하도록 했다. 당시의 박해는 더 이상 지역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조직적이고 전국적으로 행해졌는데, 이런 사실은 제국 전역에서 발견된 증명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의 박해로 인해 오리겐이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하게 되지만, 박해의 목적이 기독교 신자의 처형보다는 지속적인 회유과 고문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박해가 끝난 후 교회 내에는 ‘고백자’라는 새로운 칭호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체포되어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다수의 순교자가 양산되었지만, 데키우스의 박해는 잔인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변절하지 않았지만 순교의 면류관을 얻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고백자’란 칭호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많은 신자들의 존경과 찬사가 이들에게 쏟아졌다.

데키우스의 박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박해가 이교도 시민들의 협력이 거의 없이 순전히 당국자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즈음에는 한때 기독교인들을 향해 퍼부어졌던 증오와 비난이 근거 없는 헛된 소문으로 밝혀졌고, 기독교인들은 이교도 시민들로부터 별로 흠잡을 데 없는 이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이유로 몇몇 지역에서는 이교도 주민들이 당국자들의 기독교인 색출에 협력하기는커녕 기독교인들을 숨겨주고 피신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은 특히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디오니시우스가 당국자들에 의해 은신처에서 체포되었을 때 근처의 농민들이 몰려들어 완력으로 그를 구해냈다는 기록에서도 잘 드러난다.

다행히 데키우스가 시행한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박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칙령을 발표한 데키우스 자신이 이듬해인 251년, 고트족과의 전투 중 전사했기 때문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253년에 즉위한 발레리아누스는 초기 몇 년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257년,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인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하고 기독교인에 대한 처벌을 성문화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는 즉시 사형에 처해졌고, 기독교인으로 밝혀진 원로원 의원과 귀족들은 직위를 박탈당했다. 귀족 출신의 부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배령에 처해졌다.

이때의 박해로 인해 로마 감독 식스투스 2세와 카르타고 감독 키프리안이 처형된다. 발레리아누스가 주도한 박해는 260년,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 황제 자신이 포로로 잡히면서 그치게 된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와의 전투 중 생포되면서 제국은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이를 계기로 40년 가까운 평화기가 찾아왔다.

발레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가 발표한 반기독교적 칙령들을 철회시키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도 금지시키고 몰수된 교회의 재산도 다시 돌려주었다. 하지만 40년간 이어진 평화기는 중간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산발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모든 종교를 시리아의 팔미라 지방에서 유래한 태양신 숭배로 통일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면 교회와 제국 사이에는 다시 한 번 엄청난 충돌이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당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변절자의 처리에 관한 문제: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군인 황제의 난립기에 있었던 일련의 기독교 박해를 마무리하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가 끝난 후 양산된 다수의 변절자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생겨난 노바티안 분파에 관한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는 비록 그 기간은 짧았지만, 교회로서는 실로 오랫동안 지속될 신학적 논쟁을 낳았다. 이 문제는 한마디로 ‘변절자의 처리에 관한 문제’로 표현할 수 있다. 데키우스의 박해는 교회가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평화기를 지난 이후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평화기에 물밀듯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순교와 같은 거센 박해를 감당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박해가 시작되자 일부는 기꺼이 황제의 명령에 순종했고, 일부는 한동안 버티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분향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실제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위조 증명서를 매입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황제의 칙령을 거부하고 굳건히 신앙을 지킨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다수를 차지한 것은 물론이다.

짧지만 거세게 몰아친 데키우스의 박해는 황제가 고트족과의 전투 중 갑자기 전사하고, 이로 인해 박해가 그치면서 예기치 않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것은 ‘박해 중에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수많은 변절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의 복잡한 요인들이 부각되었다.

첫째, 변절자들에게 있어서 변절의 정도가 저마다 달랐다는 것이다.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기꺼이 제사를 지낸 자와 체포된 후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경우, 그리고 실제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증명서를 위조로 발급받은 경우 등 그 변절의 정도가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도매 급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둘째, 변절자의 처리 문제를 다룰 ‘최종적인 권위’가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새롭게 부상된 그룹은 고백자들이었다. 이들은 로마 당국의 각종 회유와 협박, 그리고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의 순결을 지켜낸 자들이었다.

박해는 멈췄지만 고백자들의 온몸에 남아 있는 고문의 상흔들은 이들의 위대한 신앙을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었다. 박해가 끝난 후 고백자들의 권위는 기존 교회 감독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게 되었다. 결국 변절자의 처리 문제를 다룰 최종적인 권위를 놓고 고백자들과 기존의 교회 감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에서 특별히 두 명의 인물이 부각되었는데, 곧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이 그들이다. 키프리안은 40세쯤 되어 개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터툴리안의 제자였던 키프리안은 스승처럼 수사학을 전공해 물 흐르는 듯한 웅변으로 반대자들을 제압하곤 했다. 데키우스의 박해 당시 카르타고 감독이던 키프리안은 순순히 당국에 체포되기 보다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방대한 서신 교환을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감독으로서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의 박해로 인해 감독을 잃은 로마 교회의 장로들은 키프리안의 이런 행동을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키프리안은 결코 자신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이것은 교인들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거듭 주장했고, 그의 이런 주장은 몇 년 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기꺼히 순교자로서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증명되었다.

하지만 변절자의 처리 문제에서 고백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키프리안은 변절자의 처리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는 고백자가 아닌 교회 감독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곧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감독회의를 소집했다. 감독회의에서는 변절자 처리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첫째, 실제 제사에 참여함이 없이 위조 증명서를 구입한 신자들은 아무 조건 없이 교회 안으로 받아들인다.
둘째, 제사에 실제로 참여한 자들은 회개의 진실성을 보여준 후에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며 회개의 정이 보이지 않는 자들은 다시 교회로 들어올 수 없다.

키프리안이 변절자들에게도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 것은 그의 확고한 교회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키프리안은 ‘교회’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노바티안은 변절자의 처리에 있어서 키프리안보다 훨씬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맞섰다. 노바티안은 키프리안이 주도한 감독회의의 결정은 변절자들이 너무나 쉽게 교회로 들어오도록 방조한 지나치게 관대한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자칫 교회의 순수성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로마 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은 로마 감독인 고넬리우스가 감독회의의 결정에 동조하자 로마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떨어져 나왔다.

이들은 노바티안을 감독으로 하는 분파 교회를 형성했는데, 노바티안이 이끈 엄수파는 6세기까지 지속되며 로마, 카르타고, 스페인, 더 나아가 소아시아까지 퍼지며 강력한 분파를 이루었다.

3세기의 기독론 논쟁

2세기에 등장한 각종 기독교 이단들에 대처하기 위해 정통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중적 사역을 담은 세례 문답에 기초해서 공동의 신앙 고백문을 만들었고 이것이 5세기경에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형태의 사도신경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3세기를 맞아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삼중적(성부, 성자, 성령) 계시를 둘러싸고 열띤 신학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는 3세기의 기독론 논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3세기에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삼중적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 일신론적인 견해를 선호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한 분 이상의 하나님들(Gods)을 섬긴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일신론적 신학을 고수하기 위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이론이 파생되어 나왔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즉 양자로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하는 양자론(Adoptionism)이다.

양자론에 기초한 기독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진 시점을 놓고 세례, 십자가 죽음, 부활 이후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양자론은 ‘동적 일신론’이란 말로도 표현된다. 이들은 분수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그리고 태양에서 햇빛이 반사되듯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능(또는 능력)이 발산되어 나온 것으로 이해했다.

안디옥 감독인 사모사타의 바울이 양자론 학파의 지도자에 속한다. 그는 또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헬라어 형용사인 ‘호모 우시오스(동일 본질)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분수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가 분수와 동일 본질이듯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난 사실은 훗날 이단으로 정죄된 사모사타의 바울이 처음 사용한 이 용어가 4세기로 넘어가면서 아리우스파 이단에 맞서기 위해 소집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통교회가 고수한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양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양태론(Modalism)이다.

양태론은 이 견해를 주장한 신학자인 사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사벨리우스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일학교에서 한 번쯤은 배우고 또 가르쳤던 설명이기도 한데, 즉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액체, 고체, 기체 상태로 변화무쌍하게 존재하는 물을 예로 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 기독론에 기초한 설명이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초대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요한다. 양태론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은 ‘성부 고난론’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를 실질적으로 동일시한 양태론자들의 주장을 확대 적용하면 결국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상에 언급한 두 개의 이론들은 비록 이단으로 정죄되기는 했지만 올바른 기독론을 정립하도록 자극했다는 점에서 교회에 큰 유익을 주었다. 당시 정통 신학의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카르타고의 감독인 터툴리안이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Trinity)를 뜻하는 라틴어인 트리니타스(Trinitas)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란 말로 정의했다.

터툴리안의 이론이 논리와 통찰력 면에서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그 후대의 신학자들은 이를 그대로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수십 년 후 로마의 노바티안은 터툴리안의 학설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로마 교인에 의해 씌어진 최초의 라틴어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노바티안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이후에 배교자들을 처리하는 문제로 붉어진 논쟁의 여파로 노바티안 분파를 이루고 정통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서방 교회(라틴어권)에 터툴리안과 노바티안이 있었다면, 동방 교회(헬라어권)에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겐이 있었다.

성경뿐만 아니라 헬라 철학에도 통달한 그는 걸작 《제일 원리에 관하여》를 통해 신학을 주도면밀하게 체계화시킨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였다. 후대에 벌어진 신학 논쟁의 기준으로 본다면 오리겐의 신학 중 일부는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

성자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부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오리겐의 이 주장은 4세기에 벌어진 기독론 논쟁에서 아리우스에 의해 채택된다. 하지만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가 “성자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펼친 것과 오리겐의 견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오히려 오리겐은 이후 정통 신학의 핵심을 차지하는 성자(예수님)의 영원한 생성의 교리를 헬라 철학의 로고스 이론으로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어쨌든 3세기에 팽팽했던 기독론 논쟁은 최종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4세기로 넘어가 니케아 종교회의와 5세기의 칼케돈 종교회의를 거쳐 마무리된다. 니케아 종교회의와 칼케돈 종교회의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