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년에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죽으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종식을 고했다. 이때부터 로마는 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등장할 때까지 50년에 가까운 군인 황제들의 난립기에 접어들면서 위기의 3세기를 맞게 된다.
원로원은 오래전에 거수기로 전락했지만, 이 시기에 로마 군단은 거수기로서 원로원이 갖고 있던 최소한의 기능마저도 무시한 채 자기 군단의 사령관을 제멋대로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부터 군단끼리의 실력 행사로 인해 거대한 로마 호(호)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반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역사가들이 이 시기를 가리켜 ‘위기의 3세기’라 부르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로마 황제가 산 채로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전대미문의 불행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전에도 로마제국에는 수시로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3세기에 찾아온 위기는 ‘위기’라는 말은 같아도 그 질적인 면에서 과거의 그것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쉽게 말하자면, 극복할 수 있었던 위기와 시종일관 대처하기에만 급급했던 위기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번 장에서는 반세기에 걸쳐 군인 황제들이 난립하는 위기의 3세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막시미누스란 이름 뒤에 ‘트라쿠스’가 붙은 것은 그가 트라키아(현 불가리아 부근) 지방 출신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출신의 트라야누스를 시작으로 속주 출신 황제들이 계속 출현했지만 그때에도 황제를 가리켜 ‘스페인 사람 트라야누스’란 식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동시대 로마인들이 막시미누스 황제를 이렇게 부른 것은 그가 속주 출신의 엘리트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하류층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치기였다. 교양은 물론 예의와도 완전히 담을 쌓은 막시미누스는 골리앗을 연상케 하는 타고난 체격을 발판으로 군 입대 자격인 17세가 되기 전인 16세에 로마군에 입대했다.
막시미누스는 초년병 시절부터 군단 내에서 심심풀이로 열리던 장사 대회에서 같은 병사들 중에는 맞상대가 없어 장교들과 힘을 겨뤘고 장교들마저 가뿐히 제치면서 군단 내에서 최고의 인기남이 되었다. 그에 대한 소문은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졸지에 황제용 막사의 경호원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크리누스가 카라칼라(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들)를 죽이고 즉위하자 막시미누스는 은인의 아들을 죽인 사람 밑에서는 싸울 수 없다며 새 황제(마크리누스)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하고 고향 트라키아로 돌아가버렸다.
막시미누스의 이런 우직한 충성심은 엘라가발루스를 이어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즉위하면서 빛을 보게 된다. 엘라가발루스 치세 때 대대장으로 복귀한 막시미누스는 다시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 때 신병 훈련 책임자로 승진했다.
급기야 게르만족과의 전투 중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암살당하면서 62세의 나이에 얼떨결에 황제로 옹립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그때까지 군단장의 경험도, 속주 총독의 경험도, 그리고 원로원 경험도 일절 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다. 로마제국 기득권층의 상징인 원로원 의원들은 막시미누스를 황제로 승인해주었지만 뒤에서는 그를 ‘야만족’이라 업신여겼다.
황제로서 자신의 캐리어에 대해 늘 열등감을 느낀 막시미누스는 이를 보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완승으로 이끄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전투만큼은 자신 있던 그였다. 그는 황제로 옹립된 후에도 수도 로마로 입성하기보다는 3년 동안 최전방인 게르만 전선에 남아 전투를 진두지휘했다.
막시미누스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각 전투의 승전보를 원로원에 전했다. 하지만 황제가 전해온 승전보는 그에게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되었다. 승전을 알리는 막시미누스의 문장 곳곳에 진하게 뭍어나는 무식함 때문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자신들이 저렇게 교양과 담을 쌓은 촌뜨기 밑에서 굽실거려야 한다는 사실에 못내 언짢았던 것이다.
막시미누스는 열등감 때문인지 자신의 곁에 교양 있는 사람 두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어쨌든 막시미누스의 혁혁한 전공으로 인해 북쪽 게르만 전선은 평온해졌고,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후 로마의 역사도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의 예기치 않은 반격으로 인해 이후 로마 역사는 극도의 혼미 상태로 빠져든다.
원로원은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당시 로마 사회에서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80세의 고르디아누스 1세와 그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추대하고, 오히려 3년간 게르만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막시미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는 자충수를 두고 만다. 이로써 원로원은 내란으로 치닫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막시미누스는 곧장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멈추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황제 취임을 위해 북아프리카에서 수도 로마로 돌아오던 중 그들의 황제 즉위를 반대한 아프리카 군단과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만다.
수도 로마는 밟지도 못한 채 황제로 지명된 지 한 달 만에 객지에서 쓸쓸이 맞이한 죽음이었다. 원로원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당황했지만 심야 토론을 벌인 끝에 원로원 의원인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그리고 수도 로마에 살고 있던 고르디아누스의 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고 셋이 연합해 로마로 진군하는 막시미누스를 대처하도록 했다.
트라키아 출신의 촌뜨기 황제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죽은 후에도 원로원이 상황을 종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두 명의 황제를 옹립하는 것을 보고 자신을 향한 원로원 의원들의 무시와 경멸에 치를 떨었다.
야만족만 무찌르면 로마 황제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고, 이렇게 계속 전공을 쌓으면 원로원도 조만간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주리라 기대했지만 이것이 완전히 자기 혼자만의 착각임을 확인하는 씁쓸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에 의해 이미 국가의 적으로 선언된 막시미누스는 본국 이탈리아에 들어서자마자 시민들의 저항을 받았고, 결국 군 단병들의 배신으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된다.
트라키아 출신 촌뜨기 황제가 너무 빨리 무대에서 사라지자 이번에는 원로원이 추대한 두 명의 황제 사이에서 쟁투가 벌어졌다. 사실 이것은 두 황제 사이의 쟁투라기보다는 두 황제를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원로원 의원들이 두 파로 나뉘어 황제를 이간질시킨 면이 더 강했다.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라는 강력한 적이 예상외로 빨리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나머지 숨겨져 있던 추악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치세의 대부분 기간 동안 속주를 순방하며 보낸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을 향해 이런 독설을 퍼부은 적이 있다. 평소에는 분열해 있다가 자기네한테 해가 미칠 것 같으면 개떼처럼 일치단결해 덤벼드는 집단이 바로 ‘원로원’이라고.
원로원의 추태에 누구보다 먼저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막시미누스의 수도 진군에 동행했지만 그를 배반하고 원로원이 추대한 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병들이었다. 이들은 지체만 높을 뿐 통치자로서는 아무런 자질이 없는 두 명의 황제를 보면서 막시미누스를 살해한 자신들의 과오를 후회하기 시작했다.
실망과 경멸, 후회감이 복합된 군단병들은 결국 두 명의 황제를 살해했고, 원로원은 버려진 시체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이로써 238년 한 해 동안 막시미누스,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도합 5명의 황제가 등장했다가 사라지면서 로마 역사상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네로 황제가 자살한 이듬해인 주후 69년 한 해 동안 4명의 황제가 존재한 적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당시의 위기의식은 원로운 의원들을 일치 단결시켰고, 마지막 남은 13살의 고르디아스 3세가 황제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초당적인 협력을 다하자는 쪽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소년 황제가 통치한 6년은 의외로 로마제국에 평온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13세의 소년 황제가 성군으로서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된 20인 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했고, 그 수장 역할을 한 티메시테우스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소년 황제는 티메시테우스를 완전히 신뢰했고 또 그의 능력에 심취했다. 통치 3년 후 소년 황제는 티메시테우스를 근위대장에 임명하는 동시에 그의 딸과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인 241년, 로마의 동방 국경에서 다시금 전운이 감돌았다. 이 해에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인 아르다시르가 죽고 왕위는 맏아들에게 순조롭게 넘어갔다. 하지만 곧바로 둘째 아들은 형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가 바로 머지않아 로마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게 될 샤푸르 1세였다.
쿠데타로 인한 국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최고의 정책은 관심을 국외로 돌리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전쟁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로마제국의 동방 국경인 시리아 속주의 수도 안디옥이 샤푸르 1세의 군대에 보기 좋게 약탈당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의 재격돌이 시작되었다.
243년에 맞붙은 격돌은 티메시테우스의 철저한 준비로 인해 로마 군의 완승으로 끝났고, 내친 김에 로마 군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승리 직후 티메시테우스가 갑작스레 죽으면서 로마 군은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황제인 고르디아누스 3세로서는 처음 당하는 위기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이야말로 황제가 혼자서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소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19세가 되었음에도 정신연령은 여전히 황제에 즉위할 당시의 13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황제의 모습에 병사들은 실망했고 결국 티메시테우스의 후임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필리푸스의 주도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전쟁터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필리푸스의 이름 뒤에 ‘아라부스’가 붙는 것은 그가 아랍 출신이기 때문이다.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지 200년을 훌쩍 넘기면서 이제는 시리아 사막의 베두인 부족 출신의 아랍인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필리푸스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한 일은 샤푸르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 것이다. 필리푸스는 야만족만 격퇴하면 자신의 제위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막시미누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서둘러 전쟁을 종결짓고 수도 로마로 돌아가 자신의 제위를 든든히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필리푸스가 제위에 오른 244년의 전황은 확실히 로마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샤푸르 1세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샤푸르 1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선택했지만 거듭 완패를 당하면서 궁정 내부에서 반대파의 손에 언제 암살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샤푸르 1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사람은 공교롭게도 적대국인 로마의 황제였다.
샤푸르 1세는 군사적 재능에서 본다면 아버지보다 한참 떨어졌지만 기회를 포착해 그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능력에서만큼은 아버지를 훨씬 능가했다. 군인 황제가 난립하면서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겪고 있던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같은 시기에 동방에서 샤푸르 1세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불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샤푸르 1세는 필리푸스가 제안한 강화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로마가 차지한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두 제국 사이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왕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묵인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로마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지만, 필리푸스는 얼른 강화를 타결짓고 수도 로마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샤푸르 1세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
필리푸스가 통치한 5년의 시간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게 흘러갔는데, 여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한 탓이다.
첫째, 국경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북방의 게르만족도,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도 이 시기만큼은 불온한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둘째, 필리푸스가 원로원을 향해 철저하게 저자세로 나갔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들은 속으로는 새 황제를 베두인족 출신이라고 경멸했지만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한 황제를 굳이 힘들게 하지 않았다.
셋째, 필리푸스가 실질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이 한참 부족한 황제는 괜히 일을 벌이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경우에 오히려 점수를 따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필리푸스의 통치 5년이 딱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국경의 군단에서는 덜 떨어진 황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갔다. 249년,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이 침입해오자 수도에서 안락한 생활에만 젖어 있던 황제는 자신의 대리인으로 데키우스를 출정시켰다.
데키우스는 장병들의 기대 이상으로 능력을 발휘해 고트족의 침입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에 대한 장병들의 불만은 데키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필리푸스는 토벌군을 조직해 북상했지만 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휘하의 병사들한테까지 버림 받은 필리푸스가 순순히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무인(武人)이면서 동시에 문인(文人)이어야 했던 로마제국 황제에 잘 어울리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다만 그에게서 최대의 불행은 그의 짧은 치세가 하필이면 도나우 강 하류 일대에 거주하던 고트족이 오랜 시간 동안 비축한 힘을 봇물처럼 터뜨린 시기와 정확히 겹쳤다는 데 있다.
40대에 황제가 된 데키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나우 강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데키우스가 죽었을 때 군사들의 발의로 ‘군율을 회복한 자’라는 묘비명이 새겨진 것은 그의 치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는 비록 짧은 치세로 생을 마감했지만 로마 군의 군율뿐 아니라 무너져가는 로마 사회의 규율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교회사에서 데키우스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사에서는 단순하게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에 기독교를 핍박한 황제들을 모조리 폭군으로 단죄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오현제 중 한 명으로 계몽군주로 추앙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기독교 박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실 초대 교회사에서 기독교 박해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10명의 황제 중에서 ‘폭군’이라고 단죄할 만한 인물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정도밖에 없다. 오히려 이들 중 상당수는 무너져가는 로마를 다시 일으키는 데 앞장선 현제들이었다. 데키우스 당시에 있었던 기독교 박해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데키우스가 의욕적으로 실시한 기독교 박해를 채 1년도 못 되어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상황이 황제가 한가롭게 기독교도 소탕에만 매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나우 강 하류의 고트족 무리는 이제 물이 가득 차서 ‘터지기 일보 직전의 댐’과 같은 상태에 있었다.
데키우스는 성년이 된 젊은 두 아들을 공동 황제로 임명하고, 둘째 아들은 수도 로마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첫째 아들과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에 나섰다. 이것은 제위 세습을 노렸다기보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측한 데키우스가 혹 황제가 전사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혼란을 미연에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불행하게도 데키우스의 불길한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당시에도 야만족이 국경을 넘어온 적이 있지만 비교적 소규모여서 금방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야만족이 제국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 왔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 중 장남이 낙마해 전사하자 데키우스는 비탄과 절망에 빠진 나머지 정신을 잃고 말았다. 복수심에 불탄 상태에서 적들을 추격한 황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늪지대로 들어갔고 그것으로 황제의 운명도 끝이었다.
데키우스는 로마 역사상 야만족과의 전투 중 장렬하게 전사한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상황은 여전히 혼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수도 로마에는 데키우스의 둘째 아들이 공동 황제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선을 최고 사령관의 부재 상태로 마냥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곧 장병들의 추대로 먼 모이시아 속주 총독인 트레보니아스가 황제 겸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황제로 추대된 그는 전쟁을 포기하고 야만족과 강화를 맺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고트족이 요구한 일체의 조건을 다 들어주었으니 강화가 쉽게 체결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강화 조건에는 심지어 고트족에게 매년 연공을 바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레보니아스는 자신의 후임으로 아이밀리아누스를 먼 모이시아 속주 총독에 임명하고 수도 로마로 서둘러 돌아갔다.
하지만 제국을 습격한 것은 야만족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전염병이 로마를 덮쳤고 데키우스가 공동 황제로 지명한 그의 둘째 아들도 수도를 강타한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었다. 운 좋게도 트레보니아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행운도 딱 거기까지였다.
야만족과 저자세 외교를 맺고 서둘러 수도로 돌아간 황제에 대한 불만이 모이시아 전역에서 들끓자 아이밀리아누스 총독은 황제가 체결한 강화 조약을 무시하고 고트족을 기습 공격했다. 군대와 모이시아 지역 주민들은 기개가 넘치는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북아프리카 원주민(무어족) 출신의 아이밀리아누스는 그의 검은 피부가 보여주듯 영락없는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고트족에 대한 그의 기습 공격은 마치 벌집을 쑤신 것과 같았고, 252년부터 253년까지 무려 30만 명에 이르는 고트족의 대규모 침입을 초래했다.
이 당시 고트족은 사상 처음으로 바다에까지 진출해 순식간에 해적으로 변했고 아테네를 비롯한 에게해 연안의 도시들도 습격을 피하지 못했다. 야만족의 침입과 약탈은 국경에 인접한 마을에서나 벌어지는 일로 여기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내던 내륙의 로마 시민들은 처음으로 넋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평화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만 평화에 너무 익숙해지면 평화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어느덧 300년간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단맛에 심취한 동시대 로마인들이 뼈저리게 깨달은 역설적인 진리였다. 절망한 시민들은 신전으로 발길을 돌렸고,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로마가 당하는 전대미문의 위기의 때에 신전에는 시민들이 바치는 헌물로 넘쳐나며 내심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이번에는 북쪽의 라인강 전선을 지키는 군단에서 수도에만 쳐 박혀 있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 이들은 남쪽의 도나우강 군단에서 옹립한 검은 피부의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이 못내 꺼림칙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자기네 사령관인 발레리아누스에게로 눈길을 돌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져 온 명문 가문 출신인 발레리아누스는 그 시대 로마가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은 존립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3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다행히도 상황은 내란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로마 군은 최고의 브랜드를 향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발레리아누스는 최후의 승자가 되어 로마로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