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11. 이 시대의 교부들

알렉산더 세베루스(222-235년)

제위 계승은 이미 후계자로 지명되어 통치 수업을 받고 있던 알렉산더 세베루스에게 순조롭게 넘어갔다. 역사가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서 시작해 알렉산더 세베루스로 끝나는 이 왕조를 세베루스 왕조라고 부른다. 원로원은 14살도 채 안 된 소년에게 모든 권력이 이양되는 것을 승인했는데, 이것은 변경의 군단장들이 제멋대로 황제를 추대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내란 상태로 빠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황제임에도 첫째 외손자가 처참하게 살해된 것을 목격한 율리아 마이사는 이번만큼은 신중하고 제대로 된 섭정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녀는 어린 황제를 도와 국정을 펼쳐나갈 고문으로 울피아누스를 고용했다.

울피아누스는 수도 로마에서 오랜 공직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법률에 관한 책을 100여 권이나 저술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소년 황제와 울피아누스는 공식 석상은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마치 풀로 붙여놓은 것처럼 찰싹 붙어 다녔다. 현명한 정치 고문을 만난 소년 황제는 선한 영향력을 받으며 점차 성군으로서 기질을 발휘해나갔다.

하지만 226년,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하면서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통치에도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후 젊은 황제의 후견인으로 나선 사람은 어머니인 율리아 마메아였다.

똑같은 섭정인데도 두 모녀의 차이점이라면 율리아 마이사는 악녀라 해도 현명한 여자였던 데 반해, 그녀의 딸인 율리아 마메아는 악녀인데다가 어리석은 여자였다는 데 있었다. 율리아 마메아는 섭정으로서 자신의 권력에 장애가 되는 사람을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첫 번째 걸림돌은 황후인 살루스티아였는데, 시어머니는 아이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며느리를 구박했고 결국 강제로 이혼시켜 로마에서 추방시켜 버렸다. 두 번째 걸림돌은 오랫동안 황제의 정치 고문으로서 선정을 이끌어온 충신 울피아누스였고, 근위대 병사들을 시켜 간단히 제거했다.

울피아누스를 통해 조금씩 회복되어 가던 로마제국은 율리아 마메아가 정치 일선에 등장하면서 급속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즈음 동방 전선에서는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오늘내일하며 간신히 명맥만 유지해오던 파르티아제국의 숨통이 끊어지며 그 자리에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사산조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인 아르다시르는 224년에 치른 전투에서 파르티아 왕을 격파하고 이후 국내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데 2년을 더 소비한 후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아르다시르는 주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무너진 페르시아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기치를 내세워 제국의 이름을 ‘페르시아’로 정했다. 역사가들은 그 앞에 ‘사산조’란 왕조 이름을 붙임으로써 주전 559년에 고레스에 의해 창건된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와 구별하고 있다.

아르다시르는 조로아스터교(배화교, 불을 숭배하는 종교)를 제국의 국교로 삼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동방에까지 진출한 로마제국의 통치권을 지중해 세계 바깥으로 몰아내겠다고 선포했다.

이것은 분명 같은 오리엔트 민족임에도 이전의 파르티아인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던 기개였다. 이로써 로마제국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 시리아 속주가 당장 위험에 처했다. 호전적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두 국가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중도점을 모색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당시 신흥 강국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과 함께 찾아올 동방의 급격한 변화를 서방(로마제국)에서 제대로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시기적으로도 로마 쪽에는 운이 없었다.

알렉산더 세베루스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던 율리아 마이사와 충신 울피아누스가 살해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고, 갓 20살이 된 황제의 곁에는 바람 앞에 촛불과도 같은 위기 상황에서 탐욕으로 가득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역량과 식견을 갖춘 중신이 한 사람도 없었다.

대개 호전적인 신생 국가는 국내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화살을 국외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아르다시르가 로마제국의 시리아 속주를 향해 자국의 군대를 보낸 것은 불과 4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232년, 제위에 오른 지 10년이 된 24세의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비로소 황제로서 자신의 ‘용감함’을 보여주어야 할 시기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격돌은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무승부로 끝이 났다. 하지만 전투 결과는 로마 군의 승리로 둔갑된 채 원로원에 보고되었다. 젊은 황제의 불행은 국가적 존망이 걸린 전투의 결과가 필요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면서 시작되었다.

힘겨운 전투에서의 승전 보고를 들은 원로원은 이제 황제가 지휘만 하면 페르시아도, 그리고 게르만족도 가볍게 물리칠 수 있다고 믿어버렸다. 그리고 종말은 2년 후에 찾아왔다.

234년, 북쪽 전선에서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었고 황제는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근위대를 이끌고 친히 출정했다. 그런데 황제는 게르만족과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경제 원조를 약속하며 교섭할 궁리만 했고 이로 인해 북방 전선의 장병들 사이에서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불만은 점차 경멸로 발전했고 급기야 이듬해인 235년, 황제는 막사로 몰려든 병사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병사들은 황제를 찌르며 “이 젖비린내 나는 놈”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웃 막사에 있던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도 저승길의 동반자가 되었다. 황제 살해는 치밀한 계획이 아닌 우발적인 사고로 일어났지만 군단 내에서는 별다른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 살해 소식은 쾰른에서 신병 훈련을 지도하고 있던 막시미누스 장군에게 전해졌다.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죽으면서 로마는 군인 황제들이 난립하는 50년 가까운 내란기로 접어들게 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교회와 국가의 충돌 제-라운드

일련의 내란을 수습한 군인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제국 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정복되지 않는 태양(Sol inbictus)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에 두 집단, 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반기를 들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종교의 확장을 막기 위해 기독교나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이것은 당시까지 시행되고 있던 트라야누스의 법령에 추가되어 시행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표된 202년은 기독교 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이전까지의 박해가 기존의 기독교 신자들을 겨냥했다면 이때부터는 새로운 개종자들과 전파자들을 겨냥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박해로 인해 리옹의 감독인 이레니우스가 순교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오리겐의 아버지(레오니다스)를 비롯해 몇몇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게 된다.

이 당시 박해로 인한 순교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카르타고의 퍼페투아와 펠리시타스다. 상류층 여인인 퍼페투아와 그녀의 여자 노예인 펠리시타스는 들소에 받혀 죽었는데, 퍼페투아는 짐승에 의해 몸이 여기저기 찢긴 가운데서도 자기의 머리를 다시 묶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다.

머리가 풀어진 것은 슬픔과 애도의 상징인데, 순교에 참여하는 이 날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두 여인은 피를 흘리면서 경기장 한 가운데에 서서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을 나눈 후 칼에 찔려 죽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했고, 특히 알렉산더 세베루스는 그의 개인적인 제단에 로마의 여러 신들과 함께 기독교의 상징인 그리스도, 유대교에서 중요한 인물인 아브라함의 성상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메아는 오리겐의 강의를 들으러 알렉산드리아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이 시대의 교부들

2세기에 나타난 말시온주의와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3세기를 맞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반응을 요구했다. 이들 이단 사상들이 나름대로의 교리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에 교회도 이에 맞서 정통 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단들의 이론 체계가 너무나 포괄적이고 체계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응전의 형태로 이즈음 조직신학적 성격을 띤 다양한 저술들이 등장하게 된다.

- 리옹의 이레니우스

130년경 소아시아(아마도 서머나)에서 태어난 이레니우스는 폴리캅의 제자로서 프랑스의 리옹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이레니우스는 <사도적 신앙의 증명>, <이단을 반박함> 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전자는 그가 교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강해한 것이고 후자는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다.

타고난 목회자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잘 돌본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면서 인류 전체의 역사를 신적인 목자이신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에 따라 이끌어가시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아테네 출신의 뛰어난 철학자였던 클레멘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과정을 통해 어린 나이에 회심을 경험했다. 그 후 기독교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오랜 여행 끝에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그는 그곳에서 판테누스라는 스승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 교사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적인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으로서 각종 사상을 섞은 혼합절충주의의 본고장이었다.

목회자 스타일이었던 이레니우스와 달리 클레멘트는 사상가요 연구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에게 있어서 학문 탐구의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을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있었다.

클레멘트는 <이교도들에게 권면>이라는 저술에서 플라톤 및 기타 철학자들의 방법론을 통한 신학 연구의 독특한 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클레멘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유대인들과는 율법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인들과는 철학을 통해 계약을 맺으셨다.

율법과 철학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진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클레멘트의 신학 체계는 그의 제자인 오리겐을 거쳐서 훗날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불리는 고유한 학풍을 형성하게 된다.

-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출신인 터툴리안은 40세 즈음에 로마에 들렀을 때 기독교를 처음 접하고 개종했다. 원래 법률가로서 수사학적 훈련을 받은 그의 저술에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성이 진하게 묻어 있다.

<영혼의 증언에 관하여>에서 터툴리안은 법원에서 사용되는 변호사의 논증처럼 법률 용어를 사용해가며 이단을 논박했다. 또한 그는 누구든지 기독교가 진리임을 발견한 후에는 다른 진리를 찾기 위한 시도조차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신자가 소유한 일련의 교리는 이미 충분하며 이런 교리를 초월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모든 이단 사상들이 쓸데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는 헬라 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체의 공상적인 사변을 정죄했다. 이런 점에서 터툴리안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정반대의 노선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207년경 터툴리안은 초대 교회 당시 이단으로 정죄된 몬타누스 운동에 합류했는데,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가는 교회사에 남겨진 숙제 중 하나이다. 터툴리안은 아마도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엄격한 모습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생애 말기에 몬타누스주의에 실망한 그는 ‘터툴리안파’로 불리는 자신만의 분파를 만들고 나왔다. 터툴리안은 라틴어를 사용한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로서 ‘서방 신학의 창시자’란 별명을 듣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오리겐은 클레멘트의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세례지원자들의 교육을 맡으며 기독교 교사로서의 천재성이 발휘된 오리겐은 헬라 철학자들이 운영하던 학당과 비슷한 형태의 교육 기관을 만들어 기독교 철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오리겐이 세운 학교의 명성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에게도 자자했는데,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찾아온 수강생 중에는 알렉산더 세베루스 황제의 어머니(율리아 마메아)와 아라비아 총독도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감독과 갈등을 빚은 오리겐은 가이사랴에 정착해 20년 동안 그곳에서 저술과 강의에 전념했다.

오리겐은 6개의 칼럼으로 구약을 편집한 <헥사플라>, 셀수스란 이름의 이교도 지성인에 맞선 기독교 변증서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최초의 조직신학 논문인 <제일 원리에 관하여>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우리는 초대 교회 당시 기독교 신학을 집대성한 오리겐의 정신적 구조와 사고의 범위에 경탄을 자아내게 된다.

하지만 오리겐이 여러 가지 점에서 기독교 신자라기보다는 플라톤주의자에 더 가까웠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만 한다. 그는 역사와 물질세계가 죄의 결과라고 주장했는데, 이 점에서 오리겐은 역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로 인식한 이레니우스와 좋은 대조를 보인다. 데키우스의 박해 때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오리겐은 70세의 나이에 두로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