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오페라가 상연되기 때문인지 카라칼라 목욕장은 현존하는 로마 유적들 가운데 가장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본명보다는 ‘카라칼라’(소매가 긴 옷)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아버지가 브리타니아에 있는 로마 군단에서 세상을 떠나자 23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단독 황제는 아니었고 한 살 아래인 동생 게타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오른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견원지간이었던 두 형제는 공동 황제가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급기야 아버지가 죽은 지 1년 후인 212년, 황궁 안에서는 예견된 참극이 벌어졌다. 카라칼라는 어머니(율리아 돔나)의 면전에서 동생 게타를 찔러 죽였고, 아버지의 치세 기간 중 발행된 가족 초상화가 들어간 주화를 모두 수집해 동생의 얼굴을 지우도록 명령했다.
군인 황제(셉티미우스 세베루스)나 철인 황제(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할 것 없이 자식들 간의 불화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던 것을 보면 ‘자식 농사가 가장 힘들다’는 경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 누나와 남동생 간의 불화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우 형과 아우 간의 불화였다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20대 초반의 젊은 황제는 알렉산더 대왕을 롤모델로 삼을 만큼 자기 과시 욕구와 야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역사가들에게 카라칼라의 치세 중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들라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본국(이탈리아 반도)을 벗어난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남발한 것을 들 것이다.
카라칼라 자신은 속주민들에게도 차별 없이 로마 시민권을 나누어 주면 그들도 자긍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로마제국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리라 예상했겠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누구나 갖고 있다’는 말은 돌려서 표현하면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는 말과도 같다.
그때까지도 희소가치를 지닌 특권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모든 속주민들에게 남발한 카라칼라의 조치는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로마 시민권’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한순간에 없애버린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이 조치로 인해 속주민들이 해마다 본국 이탈리아에 바치던 10퍼센트의 속주세가 사라지면서 로마제국의 재정 상태는 점진적으로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남발한 카라칼라의 정책은 확실히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우둔한 결정이었다. 카라칼라의 우둔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알렉산더를 롤모델로 삼고 있던 젊은 황제는 동방의 강대국인 파르티아제국을 흡수 통합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파르티아제국은 유명무실한 왕국이었고 한쪽 귀퉁이에서 사산조 페르시아로 불리는 신흥강국이 무섭게 부상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입장에서는 파르티아제국이 비록 허울뿐인 왕국이라 해도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익에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동서방 교역이라고 하는 단순히 경제적인 유익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대한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게 야만족의 침입이 없었던 곳은 파르티아제국과 국경을 접한 동쪽 전선뿐이었는데, 그것은 파르티아제국이 중앙아시아에 본거지를 둔 야만족들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제국이 버티고 있는 덕분에 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이 날뛰는 라인강-도나우강을 잇는 북쪽 전선의 방위에만 군사력을 집중하면 되었다. 이런 이유로 파르티아제국과의 공존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주전 1세기부터 국가 로마의 중요한 외교, 그리고 국방 강령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로마제국이 힘이 없어서 파르티아제국을 무너뜨린 게 아니란 얘기다.
216년, 순전히 허울 좋은 야심에서 시작된 파르티아 전쟁은 카라칼라 개인뿐 아니라 국가 로마에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안겨주었다. 로마 군은 전쟁 초기에는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전열을 정비한 파르티아 군의 게릴라 공격을 받고 급속히 와해되었다.
결국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국왕에게 사절을 보내 왕의 딸을 아내로 맞고 싶다는 제안과 함께 양국간의 강화를 요청했다. 로마 군은 예전부터 강화는 이긴 뒤에 승자의 입장에서 맺는 것이고 지고 있는 동안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을 불변의 전략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황제가 패자의 입장에서 강화를 요청한 것도 모자라 한술 더 떠 동방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게다가 카라칼라의 제안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동시대 로마인들은 ‘동방의 공주’라고 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악몽을 떠올리며 즉각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로마 황제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거스르면서 파르티아 공주에게 청혼을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까지 당했으니, 이제는 완전히 구제불능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 군영에서는 카라칼라에 대한 경멸과 반감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결국 카라칼라는 굴욕감을 안고 철수하다가 태양 신전에서 혼자 기도를 드리던 중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카라칼라의 시신은 당시 안디옥에 있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고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자결을 선택했다.
카라칼라의 죽음을 사고사로 위장한 마크리누스는 군대의 추대를 받고 파르티아와의 전쟁이 한창인 시리아 전선에서 제위에 올랐다. 파르티아 군대는 황제 암살로 인한 로마 군 내부의 혼란 상황을 물고 늘어지면서 기세등등하게 진격해왔다. 새로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의 머리 속에는 적지에서 위험천만한 전쟁을 강행할 의도가 없었고 속히 로마로 돌아가 원로원의 승인을 받고 정식 황제로 통치하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전쟁을 지속하기 힘든 겨울철이 다가오자 안디옥으로 퇴각한 마크리누스는 비밀리에 파르티아와의 강화 교섭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크리누스가 적대국과 강화 교섭을 하면서 통상적인 외교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데 있었다.
외교란 한마디로 ‘가능한 적게 주고 많이 받아내는 기술’인데, 마크리누스는 서둘러 로마에 돌아가 제위에 앉는 데에만 골똘한 나머지 파르티아 측의 요구를 100퍼센트 들어주면서 강화교섭을 서둘러 끝내버렸다. 마크리누스는 파르티아 측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했고, 심지어 복종의 상징인 금관을 선물하기까지 했다.
카라칼라가 범한 실수를 동일하게 반복하는 마크리누스를 보고 병사들은 심하게 동요했고 뒤에서 이를 조용히 지켜보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전직 황후(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이사였다. 시리아의 에메사 태생으로 태양신을 섬기는 사제의 딸이었던 그녀는 언니(율리아 돔나)가 황제(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한 덕분에 순식간에 로마의 상류층에 들어가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여인이었다.
지적이고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언니와 달리 동생은 황궁 내 여인들의 단골 메뉴인 암투와 투기를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조카인 카라칼라 황제가 암살된 후 언니인 율리아 돔나마저 자살하자 그녀에게도 비극이 찾아왔다. 평소 율리아 마이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원로원은 로마에서 그녀를 추방했고, 그녀는 고향 에메사로 돌아와 자신의 부귀영화를 송두리째 앗아간 마크리누스를 향해 복수의 칼만 갈고 있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수십 년간 파르티아제국을 막아내는 선봉에 서 있었다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시리아 군단이 마크리누스의 굴욕적인 외교로 인해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을 간파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율리아 마이사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고 이들에게는 각각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율리아 마이사는 첫째 손자를 시리아 군단장에게 데리고 가 선대 황제인 카라칼라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때로는 사실이니까 믿는 게 아니라 사실이기를 바라면서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리아 군단은 14세의 엘라가발루스를 황제로 옹립하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것으로 마크리누스의 운명도 끝이 났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게 될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한 채 타국에서 쓸쓸히 죽어간 것이다.
엘라가발루스가 제위에 오름으로써 로마제국에는 최초로 동방 출신의 황제가 등장했다. 속주 출신 황제가 등장한 지 12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의 황제들은 모두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모두가 서방 출신의 황제였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는 태어난 곳뿐 아니라 자란 곳도 시리아 속주였고, 동방의 종교인 태양신 사제로서만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고작 14살의 나이에 덜컥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서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는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었고 ‘성소를 관리하는 자’란 뜻을 가진 엘라가발루스(로마인들에게는 무척 이상하기 짝이 없는)란 이름을 끝까지 고수한 데서 나타나듯 태양신 사제로서의 정체성만 있는 사람이었다.
시리아에서 출발한 황제 일행은 1년 5개월을 거쳐 로마에 입성했는데, 황제 일행을 맞으러 나온 로마 시민들은 모두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말을 탄 15세 황제의 뒤에는 6명의 건장한 노예들이 짊어진 가마가 있었는데,
그 안에 태양신 숭배의 상징인 원뿔 모양의 검은 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엘라가발루스는 에메사의 신전에 안치되어 있던 그 돌을 로마로 가져가겠다고 극구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이렇게 황당한 그가 ‘어떻게 4년이나 무사히 제위에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그것은 순전히 외할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의 섭정 능력 덕분이었다.
황제의 오리엔트 스타일 고수에 먼저 염증을 느낀 사람은 다름 아닌 외할머니였다. 율리아 마이사는 네 살 아래의 사촌 동생인 알렉산더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황제를 설득했고 황제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통치는 동생에게 맡기고 태양신 사제로서의 직무에만 충실히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게 외할머니의 설득이었다.
하지만 공식 후계자가 된 사촌동생에게 원로원 의원과 유력자들이 줄지어 찾아가는 것을 본 엘라가발루스는 이를 곧 후회했고, 외할머니를 찾아가 후계자 지명을 철회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철없는 손자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의 머리 속은 라이벌을 죽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것으로 황제로서 그의 운도 다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근위대장은 휘하의 근위병들에게 사촌동생이 아니라 오히려 황제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18세의 황제는 병사들의 조롱을 받으며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죽음과 함께 수도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오리엔트 스타일도 말끔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