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멸망까지
열린다 교회사

9. Part 3 본격적인 쇠퇴기(180-235년)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에 의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인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천 년에 걸친 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로 치닫게 되는 시점을 콤모두스의 즉위 연도로 보고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로마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도 콤모두스의 치세를 한마디로 “제국의 재앙이었다”는 말로 거침없는 악평을 하고 있다.

이번 장에서는 180년부터 235년까지의 시기로 로마제국이 정점을 찍고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는 콤모두스의 치세부터 군인황제들이 난립하며 위기의 3세기로 접어들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다루고자 한다.

콤모두스(180-192년): 로마제국의 내리막길…

동시대 역사가와 현대의 역사가들로부터 공히 악평을 듣는 것을 볼 때 콤모두스는 분명 황제로서 부적격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현명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부적격자인 줄 알면서도 이런 찌질이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일까?

오현제 시대의 특징은 황제가 가장 적합한 인재라고 판단한 사람을 양자로 삼은 후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독특한 제위 계승 방식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도 속사정을 들춰보면 오현제 가운데 4명의 황제가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채택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콤모두스라는 장성한 아들이 멀쩡하게 있는데 실력주의에 입각해 혈통이 아닌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로마제국은 다시금 내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공산이 크다. 이것이 아마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왕재로서 자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던 숨은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콤모두스에 대한 온갖 악평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콤모두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역사서에는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가 전쟁터에서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화에서는 콤모두스가 검투 시합을 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는 황궁 안 욕실에서 살해되었다. <글래디에이터>는 막시무스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하고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역시 영화는 픽션과 논픽션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장르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가 굳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콤모두스가 아버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체육이나 경기를 좋아하는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굳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이것은 황제로서의 자질보다는 다분히 개인의 적성과 취향에 관한 문제였다.

콤모두스가 갑자기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폐인이 된 것은 제위에 오른 지 2년 뒤에 일어난 음모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4살 때 어머니를 잃은 콤모두스에게 그보다 12살 위인 큰 누나는 콤모두스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혈육이었다. 그런데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의 핵심 주모자가 큰 누나인 것으로 밝혀지자 21세의 황제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함께 의심의 노예가 되었다. 이 사건이 즉위할 당시만 해도 전혀 폭군이 아니었던 그를 희대의 폭군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이후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이 로마가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여기에는 황제의 가족도 예외일 수 없었다. 콤모두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검투 경기에만 심취했고 이것은 곧 중독 증세로 발전했다.

이로 인해 콤모두스는 프로 검투사와도 막상막하로 겨룰 만큼 고난도의 기술을 습득했다. 급기야는 병약해서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경멸하고, 자신의 진짜 아버지는 주퍼터 신이며 자기는 그 아들인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떠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정신 줄까지 놓고 만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콤모두스가 제위에 앉은 12년은 기근, 홍수, 전염병, 야만족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아버지의 통치기와 달리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시기였다.

또한 현제로 알려진 트라야누스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와는 달리 콤모두스의 통치기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콤모두스가 기독교를 이해해서가 아니라 통치에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콤모두스의 애첩이 된 마르키아의 입김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키아는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스토아 철학자로서 평생 일부일처로 절제된 생활을 한 아버지와 달리 콤모두스는 애첩과의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인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어 카프리 섬에 유배했고 며칠 후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콤모두스의 통치 12년은 황제 자신을 제외하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백해무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악몽 같은 시간은 황궁 욕실에서 목욕하던 중 애첩인 마르키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콤모두스가 목이 졸려 죽음으로써 끝나게 된다. 거사는 192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거행되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콤모두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했다. 이로써 콤모두스는 네로, 도미티아누스에 이어 세 번째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불명예스런 황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콤모두스(180-192년)내란의 시대(192-197년)

무려 12년간 이어진 콤모두스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군단의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이들이 현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맺은 서약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콤모두스가 암살되면서 이들은 선제(先帝)와 맺은 서약의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해방되었다.

비록 폭정은 일삼았어도 콤모두스는 동시대 로마인들이 모두가 존경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아들이었고 그가 공식적으로 지명한 후계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콤모두스의 암살은 본격적으로 장군들의 시대를 여는 난세의 서막이 되었다.

난세는 하극상의 시대요 인간 세상을 마치 ‘동물의 왕국’처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무법천지로 바꾸어버린다. 콤모두스가 암살된 192년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즉위하는 197년까지의 시간은 한마디로 ‘내란의 시대’로 불리는 난세 중의 난세였다.

콤모두스가 죽은 지 이튿날인 193년 1월 1일,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66세의 페르티낙스를 차기 황제로 추대했다.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밑바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상까지 올라간 그는 당대의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고 장군들의 신망도 높았기 때문에 그를 황제로 추대한다면 군단의 반발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페르티낙스는 애초에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과는 거리가 먼 우직한 군인으로서 콤모두스 암살 당시에는 수도 로마의 행정장관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장 레토는 황제의 암살 소식을 듣자마자 갖은 설득 끝에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레토는 원로원의 여론도 찬성 쪽으로 모았기 때문에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오르는 데 있어 일등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페르티낙스가 근위대장 레토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황제가 갑작스레 암살된 상황에서 누군가 빨리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네로 황제가 죽었을 때처럼 제국이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을 염려한 애국심 때문이었지 결코 황제의 자리에 대한 정치적인 야망 때문이 아니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젊은 나이에 암살되었지만 그때는 원로원의 추대를 받은 네르바가 지체 없이 공백을 메움으로써 사태를 신속하게 수습할 수 있었다. 페르티낙스는 오현제 시대의 태평성대를 연 네르바와 같은 역할을 한 후 조용히 제위에서 내려올 참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제위에 오르자마자 제위를 세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아내에게는 ‘황후’란 칭호도 주지 않고 자녀들이 황궁에 함께 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순수 무장이었던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옹립한 근위대장 레토의 생각은 달랐다. 레토는 내심 황제 옹립의 일등공신인 자신에게 황제가 논공행상으로 이집트 장관직을 하사해주길 기대했다.

이집트 장관직은 온갖 이권으로 재물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한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하지만 공과 사가 분명한 페르티낙스는 논공행상을 뒤로하고 콤모두스의 오랜 악정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국정을 수습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가자 레토는 휘하의 근위병들을 선동해 황궁을 습격했다. 노령의 황제는 단칼에 숨이 끊어졌다. 제위에 오른 지 불과 87일 만의 비명횡사였고, 그나마 아내와 두 자녀를 저승길의 동무로 삼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레토는 다음 황제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서 막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지목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황제직을 승낙했지만, 그의 앞에는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암살된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가 자신도 황제가 되고 싶다고 나선 것이다.

레토는 차기 황제 지명을 휘하에 있는 근위대 병사들의 결정에 맡겼는데, 이로써 로마 역사상 최초로 병사들을 심사관으로 한 황제직 경매가 시작되었다. 황제의 자리는 경매에서 더 많은 돈을 써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돌아갔다.

원로원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황당한 상황에 분개했지만 이미 2세기 말에는 허울 좋은 거수기로 전락한 원로원은 근위대가 추대한 인물의 황제 취임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선을 지키고 있던 군단의 장병들이 들고 일어났다. 제국의 최전방을 지키는 군단이 움직였다는 것은, 이제부터 우두머리만 교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군단끼리 충돌하는 내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4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탈리아 본토 출신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역임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이탈리아 본토 출신으로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판노니아 속주 총독을 역임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탈리아 출신 2명과 북아프리카 출신 2명이 맞붙은 4파전은 이후 4년간 이어졌고, 그 최후의 승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차지가 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7-211년): 군인황제의 철권 통치…

내란을 수습하고 수도 로마에 입성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군인 황제’의 전형으로서 철인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좋은 대조를 보이는 황제였다. 원로원 회의장 입구는 완전 무장한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었고 원로원 의원들은 무장한 병사들에 둘러싸여 근엄한 표정을 한 세베루스 황제의 연설을 들어야 했다.

황제 연설의 요지는 자기가 거병을 한 것은 제국의 앞날을 걱정한 우국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짧은 연설을 마친 후 26명의 원로원 의원들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이들은 단지 내란 중에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즉결 재판에 넘겨졌다. 세베루스는 이들을 희생양 삼아 원로원을 향해 확실한 메시지를 전했다.

“나 세베루스는 황제에게 절대 복종하는 원로원을 원한다.”

세베루스는 군인 황제답게 황제의 책무 가운데서 최우선 순위를 제국의 안전보장에 두었다. 이러한 조치로 로마 군단의 처우 개선을 위한 일련의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첫째, 군단병의 봉급이 대폭 인상되었다.

둘째, 모든 군단병에게 금반지를 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이것은 과거에 백인대장 이상의 장교와 기병에게만 허락된 권리였다. 로마 시대에 반지는 장식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인장이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군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주려는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셋째, 일개 졸병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제한 없이 승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넷째, 20년의 만기 제대를 마치기 전에도 장병들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250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의미 있는 명언을 남긴 적이 있다. “결과는 나빴다 해도 당초 의도는 훌륭하고 선의로 가득 찬 경우가 많다.”

세베루스의 조치는 정확히 카이사르의 명언이 적용되는 케이스에 해당한다. 세베루스가 병사들의 사회적, 경제적 처우를 대폭 개선해 준 것은 분명 로마 군을 질적으로 강화시키려는 선한 의도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갑작스런 처우 개선으로 군단 생활은 너무나 편안해져버렸다. 봉급은 대폭 올랐고, 출셋길은 활짝 열렸으며, 게다가 결혼을 위해 만기 제대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어졌다.

안타깝게도 세베루스가 발표한 일련의 조치들은 로마제국이 군사 정권화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을 뿐이고, 병사들은 편안한 군대 생활에 안주하며 만기 제대 후 민간인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하려는 의욕을 대폭 감소시키고 말았다.

세베루스가 죽은 후 그가 시행한 일련의 조치들로 인한 역효과는 확실히 드러났다. 그것은 민간 사회와 격리된 군대 조직이 로마 사회에서 점차 거대한 이권단체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후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황제를 손바닥 뒤집듯 갈아 치웠고, 그때마다 군사비의 터무니없는 증액을 요구해왔으며, 이것은 결국 국가 재정의 파탄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로써 세베루스는 ‘로마제국의 군사 정권화를 초래한 황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세베루스 황제를 단골로 따라다니는 또 다른 평가는 그가 ‘비로마적 전제군주’라는 것이다. ‘비로마적’이라는 말은 곧 ‘오리엔트’(동방)적이라는 뜻이었는데, 이것은 그의 아내인 율리아 돔나가 동방에 있는 시리아 속주 출신의 제사장 딸이었기 때문이다.

동방 출신의 여인이 로마제국의 황후에 앉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율리아 돔나는 미인인 데다가 교양도 높았는데, 그녀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에도 가십과 음모를 좋아하는 로마의 상류층 여인들과의 교제를 꺼리고 수시로 학자나 문인들을 황궁으로 초대해 이들과의 교제를 즐겼다고 한다.

그녀는 아마도 이런 식으로나마 남편을 따라다니는 ‘군인 황제’의 이미지를 희석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역시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의 박해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자세히 기술하려고 한다.

세베루스는 동방 원정을 통해 파르티아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분명 당대에는 치적으로 칭송받았지만 후대에는 로마제국에 재앙을 안겨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군인 황제에 걸맞은 전공이 없다고 느낀 세베루스는 무턱대고 파르티아 침공에 나섰는데 당시 파르티아는 무서운 속도로 부상하는 사산조 페르시아로 인해 국가의 존폐가 간들간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파르티아제국은 무려 300년 이상 로마의 가상 적국 1호였는데, 이것은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파르티아가 로마 입장에서 대처하기 쉬운 만만한 적이었음을 의미한다.

로마제국 입장에서 파르티아제국은 동쪽에서 찾아오는 야만족의 위협을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역할을 해주었고, 또 양국이 평화를 누릴 때 동서 교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 또한 막강했다.

다시 말해 두 제국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래서 서로 윈윈(win win) 할 수 있는 그런 역학관계를 계속 유지해왔다. 하지만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침공은 세베루스가 죽은 지 15년 후에 파르티아제국의 멸망과 그 자리에 호전적이고 타협이 통하지 않는 신생국가(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을 초래했다.

세베루스 황제 당대에는 로마의 숙적인 파르티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도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는 흥분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이것은 만만했던 ‘가상’ 적국(파르티아)을 무시무시한 ‘실제’ 적국(사산조 페르시아)으로 대체시켰고,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듯 국가 로마를 ‘3세기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211년, 브리타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장에서 죽은 세베루스 황제는 죽기 전에 이런 고백을 남겼다고 한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다 헛된 것 같구나.”

철인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 남긴 글귀 역시 군인 황제의 마지막 유언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죽으면 황제나 노예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세베루스 황제의 깊은 탄식은 자신이 죽은 후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될 제국의 앞날을 미리 예감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